오피니언 조명탄

원자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박사의 고뇌

입력 2024. 03. 29   17:11
업데이트 2024. 03. 31   12:12
0 댓글
김태우 KIMA 핵안보연구실장 전 통일연구원장
김태우 KIMA 핵안보연구실장 전 통일연구원장



지난달 미국의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오펜하이머’가 작품상 등 7개 부문을 휩쓸었다. 미국은 나치 독일이 원자탄을 먼저 만들 수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경고에 따라 ‘맨해튼 프로젝트(1942~1945)’를 통해 세 개의 원자탄을 만들었다. 하나는 핵실험에 사용했고 나머지 두 개는 일본에 투하했다. 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는 1904년 맨해튼에서 태어나 18세에 하버드대에 입학했다.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거쳐 독일의 궤팅젠대학에서 23세에 박사 학위를 받은 천재 물리학자였다. 버클리대에서 명교수로 명성을 쌓던 중 38세 나이로 핵무기 개발 책임자로 발탁됐다. ‘오펜하이머’는 그가 겪었던 고뇌와 영욕(榮辱)을 그려낸 영화다.

종전 후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프로메테우스’로 불리며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30여 개 원자력 관련 기구 및 정부 기관에서 고위직 또는 자문을 맡았고 방송국과 신문사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가운데 1948년 타임지의 표지 인물로 선정됐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고뇌의 연속이었다. 1945년 5월 나치가 항복하고 일단의 과학자들이 ‘프랭크보고서(Franck Report)’를 통해 원자탄 제조 중단을 촉구했을 때,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고민을 접고 원자탄 개발을 계속해야 한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을 따랐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실시된 첫 핵실험을 지켜본 후 “내가 지구 종말 무기를 만들었다”며 비탄에 빠졌지만, 일본의 대도시에 투하해 일본군의 결사 항전을 종식시키는 것이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길이라는 트루먼의 결정을 지지했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의 고뇌는 더욱 깊어졌다.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해 미·소 핵대결이 시작되자 ‘병 속에 갇힌 두 마리의 전갈’이라고 개탄하면서 핵 군축 협상을 촉구했다. 1951년 트루먼이 수소탄 제조에 착수하려 하자 쌍수를 들고 반대했으며 오히려 기존 핵무기를 줄이자고 외쳤다. 당시는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우려가 확산해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오펜하이머가 국가안보를 훼방하는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수군거림이 일었고 소련의 스파이라는 주장도 나돌았다. 급기야 원자력위원회(AEC)와 의회의 조사를 받았고, 안보 업무에 종사하는 인가증을 정지당했다. 1954년 원자력위원회가 재발급을 거부하면서 오펜하이머는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고 이후 버려진 야인으로 살다가 1967년 63세로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미 정부는 오펜하이머가 세상을 떠난 지 55년이 되던 2022년에 핵무기의 비인간성을 경고하고자 했던 그의 순수성을 인정해 1954년 결정을 취소했다.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를 놓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무침 곤충’이 ‘독침 전갈’과 동거해야 하는 한반도의 현실은 그가 개탄했던 ‘두 마리의 전갈’보다 더 고약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전갈이 독침을 내려놓을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에서 비핵 평화협상 만이 살길이라는 이상론자들의 주장은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실적 안보 논리에 따라 곤충도 독침을 가져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 급선무이며, 사실 그것이 비핵화 협상을 끌어내는 출발점이다. 스스로 독침을 만드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는 동맹의 독침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예선진 강군은 기본이며 강력한 확장억제와 우방과의 안보공조는 필수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