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골목 속으로 - <5> 형형색색 벽화마을 강원도 묵호
언덕배기에 삐뚤빼뚤 용케 잘 붙어 있는 집들 사이사이
구멍가게·등대 지키는 강아지·해풍에 말라가는 오징어
10분 골목길 스토리 담은 벽화, 다큐멘터리 한 편 본 기분
누가 ‘지구는 푸른 별’이라 했던가
가가호호 다채로운 ‘알록달록 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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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공짜는 없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어디 좀 재미난 곳 없나? 열심히 검색이란 걸 해야 한정된 시간 흥미로운 곳을 만날 수 있다. 묵호는 나의 검색 레이다망에 걸리지 않았던 곳이다. 강원도는 워낙 가진 게 많은 곳이다.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넘쳐난다. 그래서 묵호라는 곳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우연한 기회에 묵호라는 곳을 알게 됐고, 마치 ‘노다지’라도 발견한 듯 흥분했다. 게으른 여행자에게도 가끔 이런 행운이 찾아온다. 우연성 역시 여행의 큰 기쁨 아니겠는가? 이제 내게 강원도는 묵호다. 강원도 하면 묵호의 우뚝 솟은 언덕과 등대가 떠오른다. 삶의 땟국물이 은은하게 펴 발라진 묵호의 골목으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누구에게라도 추천해 주고 싶은 여행지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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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으로 시작된 인연
묵호의 작은 독립서점에서 강연이 있었다. 책방 주인은 원래 여행작가였는데, 여행작가가 여행작가인 나를 부른 셈이다. 책을 좋아하는 묵호 사람들과 조곤조곤 이야기나 하고 가라고 했다. 강연이 잡히면 미리 가서 여기저기 둘러본다. 일로 가지만 그렇게 여행이 된다.
군 생활을 강원도 양구군에서 했다. 그런데도 강릉이나 속초만 알았지, 묵호는 몰랐다. 예상대로 첫인상은 썰렁했다. 강원도는 요즘 가장 핫한 여행지다. 양양이나 강릉은 수도권에서 몰려드는 젊은 여행자들로 주말이면 북적북적하고, 곳곳에서 조기 마감은 물론 줄이 길게 서는 맛집이 적지 않다. 강릉이나 속초의 초대형 카페에서 보는 동해는 아름답다 못해 고급스럽기까지 하다. 묵호는 그에 비하면 아주 한산하다. 내일 허물어질 폐허 같은 쓸쓸함이 있다. 언뜻 봤을 때 그렇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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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모습 그대로 담은 벽화들
골목여행은 단계가 있다. 들어서기 전 멀리서 전체를 조망한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지구는 푸른 별이지만, 지구인에겐 푸른색은 일부일 뿐이다. 즉 전체적인 모습과 개별적인 모습은 별개란 얘기다. 언덕배기 약 40호의 집은 삐뚤빼뚤 질서가 없다. 그 삐뚤빼뚤 집들이 조그마한 산에 용케도 잘 붙어 있다. 지구의 중력을 묵호의 주택가를 보며 체감한다.
골목 입구에 진입하면 산행이 시작된다. 10분 정도만 오르면 되는 조촐한 코스지만, 다양한 벽화가 끊임없이 이어져 보는 재미가 있다. 묵호의 옛 모습을 담은 벽화들이라 그런지 다른 도시의 자유로운 벽화보다 주제가 명확하다.
‘이쯤에 구멍가게가 있었나 보군’ ‘명태와 오징어를 말리는 덕장이 많았나 보네’. 타임머신을 타지 않아도 과거로의 여행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로 역사박물관을 갈 필요도 없겠다. 스마트폰으로 잠시 묵호를 공부한 후 천천히 골목을 둘러본다면 훨씬 더 입체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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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없이 못 산다, 한때 진창이었던 골목
“신랑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 못 산다. 신부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 못 산다.” 벽화에 쓰인 문구가 재밌다. 묵호의 골목들은 진창이었다고 한다. 오징어와 명태가 말라 가면서 뚝뚝 떨어지는 물이 흙길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장화 없이는 이동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묵호는 한때 강원도 최고의 부촌이었다. 1970년대 최대 규모의 무연탄과 시멘트를 실어 나르는 곳이었고, 오징어배만 7800척이 몰려드는 강원도 제1의 항구 마을이었다. 지금의 고즈넉한 묵호와는 전혀 다른, 전국의 일꾼들로 바글바글 도떼기시장이었던 것.
돈이 활발하게 도는 부촌이었다고는 해도 산동네는 가난한 광부와 어부들 차지였다. 비린내와 석탄가루를 코로 들이켜면서 술로 시름을 달래는 이들이 집집을 채웠다. 그렇게 잘 잡히던 오징어가 줄어들고, 석탄사업이 쇠락하면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빈집이 속출하는 지금의 묵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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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관광지로 급부상 중인 묵호
10여 분을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쉰다. 평일에도 관광객이 적지 않다. 속초와 강릉에 비해 썰렁하다는 거지, 요즘 가장 핫한 여행지 중 한 곳이다. 등대 부근의 게스트하우스들은 예약하지 않으면 빈방이 없을 정도다.
등대가 나오면 골목길 여행은 막바지라고 할 수 있다. 날씨가 좋다면, 크게 감사하며 동해의 일렁이는 바다를 보자. 한때 흥했던 곳은 이야기가 있어 좋다. 게다가 묵호는 숨겨진 여행지가 주는 짜릿함이 있다. 누구나 다 아는 곳이 아니라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특별한 여행자가 된 것만 같다.
전국에 많은 벽화 골목이 있지만, 묵호는 묵호만의 색깔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아기자기한 웹툰을 보는 느낌이다. 이미 사라진 옛 모습을 벽화를 보며 상상한다. 시간의 무상함을 배울 수 있는, 참 괜찮은 골목이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본 기분이다. 분명 그리워질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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