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십자군 원정 계기 교회가 중세사회 실질 지배 시작

입력 2024. 03. 20   15:38
업데이트 2024. 03. 20   15:42
0 댓글

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⑥ 서양 근대사상의 뿌리-중세문명과 지성 ‘헤브라이즘’ (하)

초국가적 조직망에 막대한 부 갖추고
정신세계는 물론 세속의 일상사 관여
인간의 이성 억누르고 신앙 강조하는
플라톤 철학 기초한 스콜라학파 기세
사라졌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재발견
스페인 톨레도서 유럽 전역으로 전파
신앙·이성 대립하지 않고 상호보완
토마스 아퀴나스가 위기의 교회 구해

 

고전시대 지성을 서유럽에 전파하는 산실 역할을 한 스페인의 톨레도 전경. 사진=위키백과
고전시대 지성을 서유럽에 전파하는 산실 역할을 한 스페인의 톨레도 전경. 사진=위키백과



476년 서로마제국이 망했다고 서구문명도 더불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로마가 집대성한 고전문명의 보존 책임을 맡은 주역은 로마교회였다. 교회는 서유럽의 새로운 지배자로 대두한 게르만족을 개종시키고 영리하게도 이들과 정치적으로 제휴하는 적응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교속(敎俗) 제휴의 클라이맥스는 800년 성탄절 날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 샤를마뉴를 서로마의 정통 후계자로 인침한 사건이었다. 이로써 로마교회는 세속세계 실권자인 황제의 군사적 보호 아래 중세인의 정신세계 관리자 역할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공존해 오던 교속관계는 샤를마뉴 사망과 뒤이은 프랑크왕국 분열로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변화됐다. 점차 세력이 커진 로마 교황이 고유 영역인 정신세계에서 벗어나 세속의 일에도 적극 개입함에 따라 속칭 교황권과 황제권 간에 갈등이 빈발했다. 급기야 서유럽 전체를 뒤흔든, 일명 ‘카노사의 굴욕’ 사건(1077)으로 표출됐다.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을 놓고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힘겨루기를 벌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위를 점한 교황은 여세를 몰아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묘사됐듯이 거의 2세기 동안이나 오늘날 중동지역을 전쟁터로 만든 예루살렘 성지탈환운동, 즉 십자군 원정(1096~1272·총 7회)을 촉구·주도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11세기경 이후 교회가 중세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올라섰다. 교황을 정점으로 한 초국가적 조직망을 갖추고 독자적인 재판권과 광대한 주교(主敎) 영지도 소유했다. 유증(遺贈)이나 십일세 징수로 막대한 부(富)를 축적했다. 이러한 정치와 경제력을 토대로 점차 교회가 중세인의 정신세계는 물론 세속의 일상사까지 관여하는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됐다.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이나 행위는 일절 용납될 수 없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영화화한 ‘장미의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파문(破門) 조치로 공동체에서 추방하고, 여차하면 종교재판에 회부해 가혹한 고문을 가하며, 금서(禁書) 목록을 지정해 불온한 지식의 유입을 원천 봉쇄했다. 서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가는 곳마다 접하게 되는 거대하고 화려한 고딕 성당은 중세 전성기에 교회가 지녔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로마제국 멸망 후 로마교회는 어떻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로마제국이 멸망 징후를 보일 때 그리스도교 기본 교리의 체계화를 수행한 인물은 바로 중세 전반기 유행한 교부(敎父) 철학의 대부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354~430)였다. 로마제국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그는 ‘영원의 도시’ 로마가 야만족에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방대한 『신국론』(426)을 집필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의 이데아론을 원용해 진리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 천상세계와 지상세계라는 이원론적 신학 원리를 정립했다. 이에 의하면 “지상의 모든 사물은 천상 이데아의 모조품”이고 지상에서 전개되는 역사란 신(神)의 의지의 구현 과정에 불과했다. 따라서 인간의 진정한 소명은 쉼 없는 노력으로 영원한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며, 그러할 때 신의 은총과 구원이 개인에게 임한다고 봤다. 이후 『신국론』은 성서와 함께 중세 그리스도교의 지적 세계를 지배하는 책이 됐다. 이러한 초월적 세계관은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라는 교황과 교회가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는 교리이자 논리적 근거로 활용되기에 충분했다.


한 손에 성전을, 다른 한 손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들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 사진=위키백과
한 손에 성전을, 다른 한 손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들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 사진=위키백과



이 같은 맥락에서 중세 철학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설명과 체계화를 주된 목표로 삼았다. 이런 학문체계를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 이를 수행한 지성인은 스콜라 철학자라고 불렀다. 초반 혼란기에서 벗어나 서서히 문화의 꽃이 피려 한, 9세기경부터 유행한 스콜라 철학은 일찍이 저명한 교부들이 세워 놓은 그리스도교 교의에서 근거를 취했으나 그 사상적 틀은 플라톤 철학에서 가져왔다. 당연히 중세 전반기(9~11세기)의 스콜라 철학은 이성을 억누르고 신앙을 강조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12세기경에 이르러 서로마제국 멸망 후 서양 지성계에서 사라졌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재발견돼 엄청난 지적 충격을 가했다. 그의 철학은 가상의 이데아 세계보다 현실세계와 이성을 통한 설명 논리를 강조하면서 ‘무턱대고 믿으라’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에 의구심을 품도록 각성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때 곤경에 놓인 로마교회를 구한 인물은 『신학대전』(1265)으로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4~1274)였다. 1257년 파리대 교수로 임명된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조화와 종합을 시도했다. 중세 후반기 스콜라 철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그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상호 보완이 가능하다고 봤다. 플라톤 철학에 기초해 교부 철학자들이 체계화한 그리스도교의 기존 교리를 새롭게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논증하고 합리적으로 규명하려 했다. 한 예로 그는 신의 존재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개념을 원용해 ‘제1원리’라는 신조어를 통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중세 파리대학 총장과 소속 박사들의 접견 모습. 사진=위키백과
중세 파리대학 총장과 소속 박사들의 접견 모습. 사진=위키백과



서유럽에서 아주 오랜 세월 모습을 감췄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어떻게 다시 알려지게 됐을까? 그 해답은 중세시대 이베리아반도(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에 있었다. 유럽지역이 지리멸렬해 있던 중세 전반기, 그리스 학문을 보존하고 발전시킨 공로자는 바로 이슬람 학자들이었다. 7세기 중엽 아라비아반도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이슬람세력은 8세기 초엽 급기야 이베리아반도까지 장악했다. 이때 중심지로 떠오른 코르도바는 지적 암흑기이던 서양 중세에 지식과 관용의 등불을 밝힌 곳이었다. 단적으로 이곳 왕립도서관에는 무려 40만 권에 달하는 장서가 수집돼 있었다. 특히 고대 헬레니즘시대 서적이 다수 보관돼 있었다.

이후 11세기경부터 이슬람세력이 쇠퇴하면서 1085년 그리스도교 진영이 재탈환한 톨레도가 기존의 코르도바를 대신해 고전시대 지성(知性)을 서유럽에 전파하는 산실 역할을 했다. 이후 톨레도는 아랍인이 그리스, 중동, 아시아로부터 수집한 온갖 고전(古典)을 중세 유럽으로 들여온 지성의 유입창구가 됐다. 바로 이곳 번역학교에서 고대 문헌들이 그리스어(당시 유럽에서 잊힌 언어)에서 아랍어와 히브리어로, 다시 서유럽 각지에서 유학 온 학자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됐다. 이때 번역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책 『알마게스트(Almagest)』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12세기경 서유럽으로 전해졌다. 곧이어 유럽 내 중요 대도시들에 갓 등장한 대학과 기존 수도원학교를 통해 활발하게 수집·연구됐다.

신앙 우위의 시대였다고 해서 중세를 서양문명 발전을 저해한 지성사의 어두운 시기로만 단정할 수 없다. 중세에 교회가 세상을 호령하긴 했으나 고전문명을 계승하고 이를 발전시킨 공로도 간과할 수 없다. 중세 자체가 창출한 지적 유산도 주목할 만하다. 12세기경 볼로냐대와 파리대에서 출발한 대학 교육은 바로 중세 수도원 교육을 모태로 발전했다. 오늘날까지 서유럽 중요 도시 스카이라인을 차지하고 있는 장대한 고딕 성당의 첨탑과 내부의 오색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중세문명의 저력을 웅변한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과 그 속에서 창출된 지적 유산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오늘날 서양인들의 정신세계는 물론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중세의 역사적 유산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다.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고, 영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다.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고, 영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