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뮤·클 이야기 - 연극 ‘아트(ART)’
대사 맛이 절반
세르주·마크·이반 세 친구 이야기
그림 둘러싼 우정과 갈등 그려
빠르고 재치 있는 대사에 탄복
배우 맛이 절반
엄기준·이필모·박호산 등 출연
세 중견배우 연기에 감탄 절로
실수조차 재미…라이브 맛 만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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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ART)’는 세 남자가 등장하는 연극이다. 세 남자 중 한 사람 집에 모여 시종일관 떠들어대는데, 그 대사의 맛이 가히 ‘아트’다.
세 사람의 이름은 세르주, 마크, 이반. 모두 절친한 친구 사이다.
세르주는 예술에 관심이 많은 세련된 피부과 의사이며, 마크는 고전과 명언을 좋아하는 이지적인 항공 엔지니어다. 딱 문과와 이과로 구분하면 될 것 같다.
마지막 등장인물인 이반은 문과와 이과의 대극점 사이에 낀 접착제 같은 캐릭터다. 성격은 좋지만 잔뜩 물러 터진 데다 사회적 능력까지 떨어진다.
친구가 되기보다는 술집에서 시비 붙기 딱 좋은 인물 설정이지만, 이들은 의외로 오랜 기간 진한 우정을 나눠 온 사이다.
하지만 세르주가 산 그림 한 점으로 인해 이들의 견고한 우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연극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세르주가 흰 장갑을 끼고 조심조심 들고 나온 가로 150㎝·세로 120㎝쯤 되는 그림은 놀랍게도 그냥 하얀 캔버스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그림은 ‘흰색 바탕에 흰색 줄’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 ‘앙뜨로와’에 대해 세르주는 “퐁피두에 무려 석 점이나 작품이 걸려 있는 유명한 작가”라고 자랑한다. 이 ‘흰색 바탕에 흰색 줄’이 그려진 그림의 가격은 자그마치 5억 원이다.
이 그림을 본 마크는 친구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결국 “설마 이딴 ‘판때기’를 5억이나 주고 산 거냐”고 세르주를 다그치고, 세르주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판때기’라고 했는지 알고 싶다”고 받아친다. 둘의 논쟁은 점점 위태롭게 부풀어 오르고, 이쯤에서 중재자로 이반이 투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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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트’를 보는 맛은 대사 맛이 절반, 배우 맛이 절반이다. 솔직히 10분이면 설명이 끝날 에피소드를 1시간40분간, 그것도 관객들이 숨도 못 쉬게 몰아치는 작가의 솜씨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야스미나 레자라는 이름의 프랑스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다. 1994년에 발표한 희곡 ‘아트’로 몰리에르 최고작가상을 받았다. 이 작가의 또 다른 히트작으로는 ‘아트’와 비슷한 분위기의 ‘대학살의 신’이 있다. 프랑스 세자르 최우수극본상을 작가에게 선사한 작품으로 영화로까지 나왔다. 국내에서도 종종 공연된다.
뭔가 평범하고 작은 에피소드로 시작해 빠르고 재치 있게 폐부를 찔러대는 대사의 ‘대환장 파티’, 그리고 느닷없이 평온으로 돌아가는 패턴의 달인이다.
연극 ‘아트’의 경우 국내에서는 이번이 4번째 시즌이다. 2018년 초연돼 2020년, 2022년 무대에 올려졌다. 공교롭게도 2년에 한 번씩 공연돼 왔고, 아니나 다를까 2024년에 돌아왔다. 시니어팀과 ‘덜 시니어팀’으로 캐스팅을 구성하는 것도 특이점이다. 2022년 시즌의 시니어팀은 이순재, 백일섭, 노주현이었다.
이번 시즌의 시니어팀은 확실히 젊어졌다. ‘세르주’ 엄기준, ‘마크’ 이필모, ‘이반’ 박호산으로 봤는데 이들이 이번 시즌 시니어팀이다.
세 중견배우의 연기 맛이 기가 막히다. “과연 이거지” 싶은 포만감이 들었을 정도로 객석에서 몇 번이나 극의 전개와 관계없이 미소를 지었다.
엄기준과 박호산은 연극보다는 뮤지컬에서 익숙한 배우들이다. 영화, 드라마로 두 사람을 주로 접하는 이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매우 오래도록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해 온 배우다.
박호산의 무대 연기는 꽤 오랜만. 박호산은 원래 비극·희극 가리지 않는 스타일로 어느 포지션에 가져다 놔도 평타 이상을 쳐냈는데, 이젠 언제 내보내도 3할 이상을 때려내는 무시무시한 타자가 됐다. 박호산은 이반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오버연기’로 연극의 절대금지 불문율인 ‘극 중 박수’까지 받았다.
이 작품에서 이반은 세르주와 마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고 있는데, 박호산의 이반은 균형의 수준을 넘어 극 전체를 신나게 지휘하고 있다. 이반이 깔아 놓은 모래밭 위에서 세르주와 마크는 신나게 뛰고 뒹굴며 이 작품의 하얀 캔버스에 색깔을 입혀 나갔다.
엄기준의 연극 무대는 처음 본 것 같다. 그의 연기를 가장 많이 접한 작품은 아마도 뮤지컬 ‘삼총사’의 달타냥이 아니었을까. 그의 차갑고 또렷한 대사톤, 지적이지만 겉과는 다른 속을 슬쩍슬쩍 내보이는 연기를 세르주에게서도 볼 수 있다.
워낙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대사가 많은 데다 양도 적지 않아 이날 배우들은 종종 실수를 보였다(속칭 ‘씹었다’). 그런데 그게 또 그렇게 재미있으니. 이게 라이브의 ‘아트적’인 맛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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