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굽이굽이 메아리친 백성의 恨

입력 2024. 03. 07   16:21
업데이트 2024. 03. 0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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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그때 그곳 - 문경새재, 아리랑이 태어난 곳 

영남 수재들이 한양 가던 길목
조선시대 ‘과거길’로 불리던 곳
경사를 듣는다고 붙인 이름 ‘문경’

1865년 경복궁 중건 나서면서
박달나무 있는 대로 베어 공출
한양 남성의 4배 인원 부역 징발

산세 깊은 조령산·주흘산 넘으며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새재아리랑 노랫말 만들어져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영남의 수재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길목이었다. 사진은 문경새재 과거길. 사진=필자 제공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영남의 수재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길목이었다. 사진은 문경새재 과거길. 사진=필자 제공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과거길’로 불리던 곳이었다. 영남의 수재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서생들은 새재(조령·鳥嶺)를 넘어 충북을 거쳐 경기도 이천으로 들어갔다. 당시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이뤄 하루에 30㎞ 정도 걸었다고 전한다. 부지런히 걸으면 한양까지는 경남에서 20일, 경북에서는 보름가량 걸렸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합격한 이의 희소식은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소문이 먼저 전해졌다. 그래서 지명이 ‘경사를 듣는다’는 의미의 ‘문경(聞慶)’으로 정해졌다. ‘문경새재’는 기쁨 외에 슬픔과 고난의 뜻도 품고 있다. 민요 ‘아리랑’에 등장하면서다.

아리랑의 노랫말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고난을 극복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구보는 우리 지형에 흔한 ‘고개’라는 개념이 아리랑을 태동시킨 요소가 아닌가 여긴다. 아리랑의 어원 28가지 가운데 ‘낭자를 떠나간다’는 뜻의 아리랑(我離娘)과 함께 ‘고개를 떠나간다’는 의미의 ‘아리령(我離嶺)’도 있다.

구보는 이별가 정도가 그렇게 도도한 흐름을 이어가지는 못한다고 여기며 ‘고개 설(說)’에 한 표를 던진다. 고개를 넘어가는 힘든 과정이 고생을 견디며 마침내 이겨 내는 모습과 닮은 까닭이다. 아리랑 민요에서 ‘고개’는 수난을 상징하고 그것은 어김없이 극복의 대상이 된다. 그런 연유로 모든 아리랑 노래의 후렴에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가 붙는다. 춘원 이광수는 1924년에 쓴 『민요소고』에서 아리랑을 ‘뜻이 소실된 채 향 좋은 후렴만 남겼다’고 했다. 구보는 기원이 가졌던 의미는 사라지고 패턴처럼 붙은 후렴 덕에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 후렴만 지키면 앞에 담기는 내용은 무엇이라도 좋았다.

그래서 아리랑은 시대·상황별로 다양한 사연을 담았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천연두가 온 나라를 덮쳤을 때 민중은 아리랑 가사에 ‘종두(種痘)를 맞고 천연두를 이겨 내자’는 가사를 담아 전파했다. 새재아리랑도 그렇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할미성 꼭대기 진을 치고/왜병정 오기를 기다린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노랫말에 언급되는 연고로 문경새재가 아리랑의 실지(實地)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아리랑의 시초를 경복궁 중건과 연관 짓는다. 1865년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1820~1898)이 풍양 조씨나 안동 김씨 등 세도가문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상징적 조치로 경복궁 중건에 나섰다. 국가 재정이 어렵던 시절, 7225칸 규모의 왕궁을 지으면서 대원군은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기부금으로 원납전(願納錢)을 조성하면서 돈으로 벼슬을 사는 폐단이 생겨났고, ‘땡전(당전·當錢) 한 푼 없다’는 유행어를 불러온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했다. 실질 가치보다 100배나 높은 명목가치를 지니게 만들어 그 차액으로 부족한 재원을 확보하려는 계산이었다(『면암집』·최익현). 이 시기 문경 박달나무들이 있는 대로 베어져 경복궁으로 공출됐다. 박달나무들과 함께 삼남(三南)의 부역인들도 동원됐는데, 이들 수가 한양 거주 남성의 4배에 달했을 정도였다. 나무와 사람들이 모두 1017m 높이의 조령산(鳥嶺山)과 1106m 높이의 주흘산(主屹山) 사이에 난 새재를 넘어갔다.

조령산은 ‘새도 쉬어 갈’ 정도로 높고, 주흘산은 ‘중악(中嶽)’이라는 별칭답게 ‘나라의 기둥이 되는 산’이다. 이 새재를 목재를 끌고 넘어 충북과 경기도를 거쳐 한양으로 향하는 중노동을 거듭하면서 ‘새재아리랑’이 만들어졌다. 고단함을 덜기 위해 부른 노동요 성격의 ‘새재아리랑’이 일꾼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구전민요(口傳民謠)로 자리 잡았다.

흥선대원군이 일꾼들의 여흥을 위해 아리랑 경연대회를 열면서 아리랑은 더욱 활성화됐다. 구보는 ‘아리랑 고개’가 경복궁 중건을 매개로 문경새재에서 연유한 시어(詩語)가 민요로 정착한 것이라는 주장에 공감한다. 1896년 고종의 외무특사이던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1863~1949) 박사는 한국학 연구지인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의 ‘코리안 보컬 뮤직(Korean Vocal Music)’이란 논문에서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은 존재다. 어딜 가더라도 들을 수 있다. 1883년부터 유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노래는 즉흥곡의 명수인 한국인들이 끝없이 가사를 바꿔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후렴구는 바꾸지 않았다”고 적었다. 헐버트 박사는 아리랑의 시작을 1883년으로 전했지만, 구보 생각에는 그 시작을 경복궁 중건기간인 1865년경으로 보는 게 타당할 듯싶다. 그가 서양 악보에 아리랑 가사를 채록해 알파벳으로 남긴 기록에 ‘문경새재 물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는 노랫말이 담긴 까닭이다. 아리랑 역사상 최초의 기록으로 경복궁 중건시기를 아리랑의 효시로 보는 증거가 되고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과 맞물리면서 아리랑은 민족의 자긍심을 온존하려는 미디어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문경아리랑’을 원조로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춘천아리랑’ ‘긴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본조(本調)아리랑’ 등이 생겨났다. 본조아리랑은 다른 아리랑과 차별화하려는 경기민요 아리랑의 이름이다. 1926년 나운규 감독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아리랑’ 주제가였던 ‘신아리랑’은 대단한 위력을 보이며 아리랑을 나라 전체로 파급시켰다. 이 신아리랑의 후렴에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노랫말이 처음 등장해 전국의 아리랑 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08년부터 ‘새재아리랑제’가 열리고 있다. 2020년 6월에는 코로나19 상황임을 감안해 아리랑의 힘으로 역병을 이겨 내자는 취지의 축제도 개최한 바 있다. 구보는 당시 현장을 지켜보며 한민족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집단정서를 가동해 상생의 기운을 얻어 온 저력의 중심엔 늘 아리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리랑은 앞이 뒤를 끌어주고 뒤가 앞을 밀어주는 모양새를 보이며 지금에 이르렀고, 앞으로도 무한 반복될 것으로 여긴다. 구보는 아리랑이 단순히 노래를 넘어 한국의 힘이 돼 왔다고 느낀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 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 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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