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중년의 위기,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입력 2024. 02. 23   14:57
업데이트 2024. 02. 2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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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지 양 번역가
노 지 양 번역가



“난 데이트 상대 나이는 39~47세로 설정했어. 인생의 결과를 아는 사람이 좋아. 세상은 뜻대로 안되잖아. 아무리 조심하고 착하게 살아도 말이야.”

미국 드라마 ‘사랑 이후의 부부 플라이시먼’의 주인공 토비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뉴욕의 간의학 전문의인 토비는 몇 달 전 아내 레이첼과 이혼을 하고 자녀 해나와 설리를 공동으로 양육하고 있다. 아이들의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레이철이 사라지고 연락이 두절된다. 토비는 정신없이 바쁜 병원 업무와 돌보아야 할 아이들과 전 부인에 대한 불안과 걱정, 인생에 대한 후회와 실망으로 괴로워하다 대학 시절 친구들을 만나 신세 한탄을 하며 위로를 받기로 한다.

뉴욕타임스 매거진 기자였던 태피 브로데스애크너의 소설 『사랑 이후의 부부, 플라이시먼』은 “현대의 사랑과 결혼의 초상을 완벽하게 그렸다”는 찬사를 받으며 2019년 다수의 언론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이 됐다. 2022년에는 제시 아이젠버그, 클레어 데인즈 주연의 드라마로 탄생했다. 원제는 『플라이시먼 이즈 인 트러블(Fleishman is In Trouble)』 로 직역하면 ‘플라이시먼은 이제 큰일 났다’. 혹은 상황을 알고 의역해보면 ‘진퇴양난의 플라이시먼’이 될 수도 있겠다.

다시 뭉친 세 친구 중 리비는 잡지사에서 15년 일하며 유명 작가가 되기를 꿈꿨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뉴저지의 전업주부로 살며 지루한 생활에서 탈출구를 찾으려 한다. 화려한 싱글로 지내던 친구 세스는 갑자기 해고당한다. 이들의 웃음 사이에서 위험한 소리가 들리는데 그건 바로 청춘의 소리다. 1994년 앳된 모습의 열아홉 청춘들은 이스라엘을 여행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꿈꿨었고, 토비는 한 주술사에게 “앞으로 나쁜 일이라곤 없는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로부터 22년 후, 토비는 온갖 ‘트러블’을 안고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한숨을 푹푹 쉬는 40대가 됐다.

공교롭게도 이 드라마의 내용은 내가 지금 번역하는 책과 맞물리며 20대와 40대의 간극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 현재 어떤 소설가의 일기와 노트를 번역하고 있는데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아 다른 번역가와 공역을 하게 됐다. 내가 초반과 후반을 번역하고 동료가 중반을 번역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매일 만나는 작가가 25세였다가 어느 날 45세가 돼버린 것이다. 20대 초중반의 작가는 매일 밤 뉴욕의 파티에 가고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고 대략 이틀에 한 번씩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일기장에는 “오늘 행복했다. 나의 미래는 찬란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가득하며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40대 중반으로 넘어온 작가는 이 한마디를 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도대체 그 사이 20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낙관적이던 20대는 냉소적인 중년이 된 걸까?

물론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세월, 그리고 경험. 무수히 많은 실패와 좌절과 배신의 날들과 성공과 환희와 행복의 순간들. 『사랑 이후의 부부, 플라이시먼』의 토비는 결국 현실을 받아들여 회복돼 가고 리비는 잠시간의 방황을 접고 가정으로 돌아가며, 독신주의자였던 세스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을 한다. 또한 내가 번역하고 있는 책의 저자는 거듭 사랑에 실망했으면서도 이후에 몇 번 더 사랑에 빠지며 ‘사랑이란 감정은 내가 안고 살아야만 할 것’이라 쓰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인생은 예측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20대와 40대의 간극이 그렇게까지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처음과는 다른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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