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서양문명 초석 놓은 로마제국 ‘지성의 저수지’ 역할

입력 2024. 02. 21   14:39
업데이트 2024. 02. 2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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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④ 서양 근대사상의 뿌리 - 로마문명과 지성 ‘헬레니즘’ (2)

1200년 동안 지중해세계 제패한 로마
직선도로·수도교 등 실용주의 꽃피워
최강 전투력으로 ‘무적의 대명사’ 불려
법·조세 등 근대 통치시스템의 시작점
그리스도교 탄압하다 수용하는 등
다양한 민족·문화에 개방적 성향
공화정 시기 스토아학파가 대세
제정시대엔 에피쿠로스학파 주목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로마시대 수도교인 퐁 뒤 가르. 사진=위키백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로마시대 수도교인 퐁 뒤 가르. 사진=위키백과

 


이전 글에서 그리스문명이 오늘날 서양세계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합리주의 등의 뿌리임을 살펴봤다. 서양문명을 특징짓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로 사변적 탐구보다는 경험과 실질을 중시하는 실용주의(Pragmatism)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라틴족 로마인을 통해 서양문명에 뿌리내렸다. 로마문명의 실용적 특징은 로마제국이 후대에 남긴 수도교(水道橋)나 직선도로 같은 기반시설에서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BC 70~19)의 건국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0년경 이탈리아반도 중앙부의 작은 부족국가로 출발했다. 이후 성장을 거듭해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해양강국 카르타고와 겨룬 포에니전쟁(BC 264~146)에서 승리하면서 지중해를 장악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으로 기원전 50년경에는 서유럽과 소아시아를 아우르는 지중해세계 전체를 제패했다. 그리스인이 연못의 개구리처럼 지중해라는 내해(內海)의 요충지에 항구를 건설하고 그곳에만 머문 데 비해 로마인은 항구를 교두보 삼아 사방으로 도로를 낸 뒤 내륙 깊숙이 진격해 기름진 땅을 모두 차지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했는데, 이는 건국 이래 무려 1200년의 세월이었다. 역사상 어떠한 국가나 제국도 이처럼 장기간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어떻게 로마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직접적으로는 로마가 구축한 체계적인 군사조직과 효율적인 운용을 거론할 수 있다. 로마인은 건국 초기부터 주변 부족들과 부딪히며 얻은 실전 경험을 토대로 군대를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실질을 숭상한 로마인의 생활태도와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고귀한 의무감’이 군사력 증강의 초석이었다. 로마군의 발전은 병사 개인의 무장(武裝)부터 정교한 전투대형, 효율적인 무기체계에 이르기까지 전 범위에 걸쳐 이뤄졌다. 그 결과 긴 세월 동안 로마군단(Roman Legion)은 무적의 대명사였다. 먼저 문명을 꽃피운 그리스인이 단일대형 팔랑크스에 집착한 데 비해 로마군은 이를 다양한 규모의 대형으로 세분화해 고도의 유연성을 부과했다. 글라디우스(칼), 필룸(투창), 스쿠툼(방패)으로 무장한 군단 병력을 치밀하게 조직화해 흡사 ‘전쟁기계’처럼 작동하게 만들었다. 최강의 전투력 발휘는 당연한 결과였다.

이와 더불어 로마제국을 전성기로 이끈 진정한 힘은 로마인의 실용적 문화에 있었다. 그리스인이 창조적 문명을 선보인 데 비해 후발 주자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인은 광대한 제국의 통치에 필요한 실질적 문명을 꽃피웠다. 이는 로마법이나 정치·군사제도, 물질적 유산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대륙법의 뿌리가 로마법에 있을 정도로 로마인은 유스티니아누스(재위 AD 527~565) 대제 통치 시 편찬한 『로마법대전』을 통해 후세에 고도의 법률체계를 전해 줬다. 군사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상·하원제 의회나 관료·조세제도 등 근대세계의 통치시스템 대부분은 로마문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장구한 세월에도 여전히 위용을 뽐내고 있는 판테온, 콜로세움, 수도교, 군사도로 등은 로마문명의 실용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 내부 모습. 사진=게티이미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 내부 모습. 사진=게티이미지



전성기 로마문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 또 다른 요인은 로마인의 개방적 성향이었다. 지중해세계 제패 과정에서 로마인은 다양한 민족 및 문화와 접촉했으나 자신의 문화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 대신 피정복민의 문화일지라도 통치에 유용하다고 판단될 경우 이를 적극 수용해 체화했다. 문명과 야만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로마문명을 개방, 누구든 차별 없이 로마의 선진문명을 향유하고 동경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심지어 일정한 자격을 갖춘 경우 속주민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해 정치 참여의 길을 열어 줬다. 원래 다신교 사회인 로마는 유대인의 종교에서 유래한 그리스도교를 한동안 탄압했으나 종국엔 제국의 종교로 수용(313년 밀라노칙령)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세기 독일의 저명한 법학자인 루돌프 폰 예링은 “로마는 세계를 세 번 정복했다. 한 번은 무력으로, 한 번은 그리스도교로, 그리고 또 한 번은 법으로”라고 적절하게 묘사했다.

지성적 측면에서도 로마는 그리스와 다른 특징을 보여 준다. 그리스인이 현실과 유리된 영속하는 초월적 세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데 비해 로마인은 현재 삶과 관련된 개인의 현실 문제 및 국가 과업과 연관된 덕목에 집중했다. 지적 사조(思潮)도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 알렉산드로스 정복시기에 국제화된 그리스 학문과 사상을 수용해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스토아학파(Stoicism)와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ism)를 꼽을 수 있다.

로마공화정과 로마제정 초창기에 크게 유행한 지적 조류는 스토아학파의 사상이었다. 로마공화정 말기 최고 지성인이자 정치가로 평가되는 키케로(BC 106~43)와 로마제정 초반 대표적 지성인으로 꼽히는 세네카(BC 4~AD 65)가 스토아철학을 꽃피웠다. 이들은 만물의 지배 원리를 신적(神的)인 이성(Logos)으로 간주하고 바로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욕심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Apatheia)’의 자세로 이성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것이 선(善)이고 행복이라고 주창했다.

이러한 스토아학파와 대비되는 학설을 내세우며 로마인의 정신세계에 나름 영향을 준 또 다른 사조는 에피쿠로스학파였다. 통상 에피쿠로스(BC 341~270)에게는 오직 육체적 욕망 추구에만 매달린 쾌락주의자라는 평판이 늘 따라다닌다. 물론 그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즐기는 인생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간주한 것은 사실이나 결코 방종한 쾌락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여타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에피쿠로스도 인간이 어떻게 하면 최대의 행복을 누리면서 최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검소한 삶, 고통과 공포의 부재, 욕망의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기인하는 마음의 평온에서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시대 최고의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자는 루크레티우스(BC 98~55)였다. 그는 유려한 라틴어로 쓴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창조주 및 영혼, 사후세계 등 그리스도교의 절대 명제를 모두 부정했다. 달리 말해 이론이나 지성과 같은 무형이 아닌 삶 속에서 직접 만지고 느껴지는 실체(감각)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사적 이익보다 공익 중시 기풍이 강했던 공화정 시기와 제정 초창기에는 스토아학파가 대세였다. 제정시대가 무르익으면서 공동체보다 자신이 처한 현재의 삶을 더 중시한 로마인의 세속적 태도가 유행하며 감각세계를 내세운 에피쿠로스학파가 주목받았다.

하지만 어느 것도 시간 앞에 장사가 없는 법인지 세계를 호령한 로마제국도 결국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말기인 395년 공식적으로 동서(東西) 로마로 분열됐다가 현재 서유럽에 해당하는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정치적으로 로마는 사라졌으나 그 문명의 뿌리는 남아 서양문명의 초석을 놓았다. 지중해세계 전체를 장악한 덕분에 로마는 그리스문명, 그리스도교문명, 로마 자체 문명을 통합·보존한 ‘지성(知性)의 저수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게르만족을 통해 중세로 전달함으로써 현대 서양문명의 모태로 자리 잡았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다.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고, 영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다.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고, 영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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