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군인들
32. 일본 육사 7기와 8기 출신 군인들
1896년 8기 특별과정 11명 입교 후 고종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권 붕괴
일본 유학 장교들 귀국령…육군무관학교 교관 임명돼 선진 군사학 전수
친러 정권 아래 숨죽이다 러일전쟁 후 득세…다수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1894년 9월, 고종이 일본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를 파견했다. 이 시기는 같은 해 6월(양력 7월)에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청군을 조선 땅에서 몰아낼 무렵이었다. 전쟁 상황을 지켜보다가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보빙대사를 보낸 것이다.
보빙대사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화군 이강(李堈)이었다. 이강은 고종과 귀인 장 씨의 소생으로 후일 의친왕이 되는 인물이다.
이때 이강을 수행한 이병무(李秉武)라는 무관이 있다. 1886년에 무과에 급제한 이병무는 미국식 사관학교인 연무공원에서 교육받은 인재였다. 이병무는 이강이 귀국한 후에도 일본에 계속 남았다. 그해 10월에 일본군 하사관을 양성하는 기관인 육군교도단에 입학한 것이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 때문에 일본 유학이 중지된 이후 1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이병무는 육군교도단을 졸업한 1895년 5월에 곧바로 일본 육사에 입교해 1896년 3월 10일에 수학증서를 받았다.
당시 일본 육사에 진학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육사의 예비학교인 5년제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거나, 5년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입시에 합격해야 했다. 하지만 보통학뿐만 아니라 기초군사학을 배운 육군유년학교 출신들이 훨씬 유리했다.
입학이 확정된 사관후보생들은 입교하기 전에 지정된 연대나 대대, 즉 원대(原隊)에서 6~12개월 동안 일반병으로 복무했다. 이것을 대부(隊附) 근무라고 한다. 병사와 하사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나중에 지휘관이 됐을 때 큰 도움이 된다는 독일식 교육을 따랐기 때문이다.
중학교 출신자들은 원대에서 1년 동안 부대 교육을 받았고, 유년학교 출신들은 6개월만 받았다. 즉 중학교 출신들은 12월에 일등병으로 입대해 이듬해 6월 상등병으로 진급했지만, 육군유년학교 출신들은 6월에 상등병으로 입대하는 것이다.
사관후보생들은 8월에 오장(伍長·하사), 12월에 군조(軍曹·중사)로 진급했다. 그리고 파견 형식으로 육사에 입교해 1년6개월 동안 교육을 받았다.
육사에서 교육을 마친 사관생도들은 졸업과 함께 조장(曹長·상사)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다시 원대로 복귀해 6개월가량 견습사관(見習士官)으로 근무한 후에야 소위로 임관했다.
중학교 출신의 경우 원대에서 1년, 사관학교에서 1년6개월, 다시 원대에서 6개월, 총 3년 동안 교육과 실습을 거친 후 소위로 임관했다. 이에 비해 유년학교 출신은 중학교 출신보다 6개월 짧은 2년6개월의 과정을 거쳤다.
현역군인 출신의 유학생이었던 이병무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속성으로 특별과정을 마친 것인데, 당시 함께 교육받은 일본인 생도들과의 관계를 봤을 때 7기 특별과정으로 추정된다.
1896년 3월 귀국한 이병무는 4월에 대한제국군 정위(대위)로 진급하며 육군무관학교 교관에 임명됐다.
1896년 1월에는 현역군인과 관비 유학생 11명이 일본 육사에 입교했다. 권태한·김상열·성창기·왕유식·이대규·이희두·조성근 7명이 현역군인이었고, 박장화·박희병·장명근·최병태 4명은 관비 유학생이었다. 군인 7명 중 6명은 장교였다. 성창기와 조성근이 부위(중위)였고, 권태한·김상열·왕유식·이대규는 참위(소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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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가을에 일본인 8기생들이 입교했으니, 조선인 11명은 8기생들과 함께 교육받았을 것이다. 즉 8기 특별과정으로 보면 대과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입교하자마자 본국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해 2월 11일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친일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섰다.
목숨이 위험해진 친일파 인사들은 대거 일본으로 망명했다. 친(親)러시아 내각은 일본 유학생들을 백안시했다. 친일파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일본 유학을 추진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실상 유학생의 대다수가 친일파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였다.
그해 7월 8일, 조선 정부가 일본 육사에 유학 중인 장교들에게 귀국 명령을 내렸다. 장교가 아닌 이희두만이 예외로 계속 일본에 남았다.
귀국한 6명의 장교는 다시 군에 복귀했다. 이병무에 이어 이들도 대부분이 육군무관학교의 교관에 임명됐다. 일본에서 배운 선진 군사학을 전수하라는 의미에서 당연한 배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고종이 근대적인 사관을 양성하기 위해 설치했던 교련병대·연무공원·육군무관학교의 교관들은 일본인·미국인·러시아인 등 외국인들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유학파 한국인 장교들이 사관 교육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홀로 일본에 남은 이희두는 어떻게 됐을까. 이희두는 1897년 7월에 육사를 졸업하고, 곧바로 육군도야마학교에 입학해 1898년 10월까지 군사학을 더 공부했다. 이희두는 육군도야마학교 재학 중이던 1898년 8월 대한제국군 육군 부위에 임명됐다. 1899년 8월 육군무관학교 교관에 임명됐으며, 그해 10월 정위로 진급했다.
비록 군에 복귀했지만, 이들은 출세와는 길이 멀었다. 일본 유학파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조선에서 득세하는 1904년까지 8년 동안 한직을 전전하며 숨을 죽이고 살았다. 그렇다면 러일전쟁 이후 이들은 무슨 계급까지 진급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7기 특별’ 이병무는 부장(副將·중장)까지 진급하며 최고위직인 군부대신(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1907년 순종 황제를 협박해 대한제국군을 해산하고 의병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정미칠적(丁未七賊)과 경술국적(庚戌國賊)의 한 사람으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다. 한일병탄 후 일본군 중장에 임명됐으며, 조선 귀족(자작) 작위를 받았다.
‘8기 특별’ 중 박장화·성창기·이대규는 대한제국군 참령(參領·소령), 권태한은 부령(副領·중령)까지 진급했다.
왕유식은 대한제국군 정령(正領·대령)까지 진급했으며, 근위보병대장을 역임했다. 한일병탄 후 일본군 소장을 지냈다.
이희두는 대한제국군 참장(參將·소장)까지 진급했으며, 육군무관학교장과 군부협판(국방부 차관)을 지냈다. 한일병탄 후 일본군 소장을 지냈다.
조성근은 대한제국군 참장을 지냈으며, 한일병탄 후 일본군 중장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이처럼 일본 육사 7기 특별과 8기 특별 출신의 많은 수가 친일파로 변절했다. 국록을 먹은 자들이, 거기에 더해 나랏돈으로 선진 군사학을 배운 자들이 나라를 배신했으니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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