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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쉼표

입력 2024. 02. 06   16:39
업데이트 2024. 02. 0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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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폭망’ 주인공은 무엇을 건네나

오늘은 해가 뜨지 않았지만
내일은 뜰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뜨지 않는 해를
그럼에도 기다리고 있다

JTBC의 토·일 드라마 ‘닥터슬럼프’의 한 장면. 사진=JTBC
JTBC의 토·일 드라마 ‘닥터슬럼프’의 한 장면. 사진=JTBC


망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극단적인 상황 설정으로 이야기를 여는 작품들은 다양하다. 핵전쟁, 좀비사태, 기후 재앙, 운석 충돌 등 아무튼 예기치 못한 무언가로 인해 송두리째 파괴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그런데 이 ‘망함’의 규모를 세계 전체가 아닌 개인으로 축소시키면 어떨까. 작품의 장르도, 분위기도 확 바뀐다. 세상 모든 게 그대로인데, 나만 홀로 망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지구 멸망으로 모두가 무(無)에 가까운 상태에 닿아 평등한 것보다 더욱 암울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늘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지독히 상대평가에 익숙한 존재니깐. 

지난달 27일 첫 방송을 한 JTBC 토·일 드라마 ‘닥터슬럼프’는 이러한 인생 변곡점에 선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다. 제목 그대로 인생 최대의 슬럼프에 빠진 의사들의 ‘망한 인생’ 심폐소생기. 학창 시절 전교 1등, 한국대 의대 진학, 실력 있는 성형외과 의사, 장관상 수상에 출연하는 유튜브 채널은 골드버튼을 받을 만큼 인기다. 외모도, 인성도 훌륭한 스타 의사 ‘여정우’(박형식)는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그렇게 차곡차곡 긴 세월 쌓아 올린 그의 인생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그저 찰나에 불과했다. VIP 환자가 사망하는 의료사고, 이른바 ‘마카오 카지노 재벌 상속녀 사망사건’으로 여정우는 100억 원대 소송에 휘말리고 인생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여정우와 학창 시절 1등을 다퉜던 ‘남하늘’(박신혜)도 마취과 의사가 됐지만, 번아웃증후군과 우울증으로 말미암아 평범한 인생을 살아 내기조차 버겁다. 교수의 부당한 요구와 갑질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남하늘은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퇴사를 결심한다. 만나면 으르렁댔던 여정우와 남하늘 두 사람은 그렇게 각자의 슬럼프를 안고 14년 만에 마주한다.

‘닥터슬럼프’보다 나흘 늦게 시작한 동 채널 수·목 드라마 ‘끝내주는 해결사’의 주인공 ‘김사라’(이지아)의 삶도 순탄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최고 로펌 ‘차율’의 며느리이자 잘나가는 이혼 변호사였던 김사라는 믿었던 남편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이혼당한 채 전과자로 전락한다. 더욱이 아이까지 빼앗겼다. 돈, 명예, 소중한 피붙이까지 몽땅 잃어버린 최악의 상황이다.

의사와 변호사, 성공한 전문직을 대변하는 해당 직종에서도 상위에 자리했던 두 작품 속 주인공들의 실패와 추락은 그렇기에 더 뼈아프고 쓰라리다. 공교롭게도 ‘닥터슬럼프’ 전작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 역시 유사한 상황이 등장한 바 있다. 국내 최정상 패션 포토그래퍼 ‘조삼달’(신혜선)이 억울한 후배의 갑질 논란에 휘말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인 제주도 삼달리로 도망가는 초반 도입부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제일 잘나가’란 노래가 누구보다 어울렸던 주인공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사건으로 물질적 풍요와 명예를 몰수당하고 정신적 고통을 내면으로 들인다.

JTBC의 수·목 드라마 ‘끝내주는 해결사’의 한 장면. 사진=JTBC
JTBC의 수·목 드라마 ‘끝내주는 해결사’의 한 장면. 사진=JTBC

 

이토록 주인공의 망한 인생을 앞세워 드라마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아니, 그보다 앞서 왜 이렇게 비슷한 설정의 작품이 범람하게 된 걸까? 긴 코로나19 팬데믹이 지나고 물가와 금리의 동반 상승, 경제적 불황이 차례로 고개를 드밀고 있다. 평범한 보통의 삶을 영위하는 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고, 갑자기 들이닥친 시련으로 괴로워하고 좌절하는 이들의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를 통해 들려온다. 누군가에게는 마냥 즐겁고 행복한 타인의 이야기가 불편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자극적인 스토리로 도파민을 자극하는 것도 해법은 아니다. 최악을 마주한 주인공에게 펼쳐진 또 다른 세상, 그리고 이후 그들이 그것을 극복하거나 혹은 그 자체를 포용하는 서사가 왠지 좀 더 흥미롭고 구미를 당긴다. 

강제적으로 주어진, 인생 쉼표의 시간. ‘닥터슬럼프’의 여정우는 남하늘이 학창 시절 공부하기 위해 참았다는 떡볶이, 오락실, 노래방을 함께 즐긴다. 성공을 위해 우선순위에서 밀려 포기했던 소박하고 평범한 순간을 만끽한 그들은 억지로 힘내지 않고 그냥 쓰러져 있는 편을, 그렇게 쓰러진 김에 좀 쉬는 삶을 택한다. ‘끝내주는 해결사’ 김사라는 변호사가 아닌 이혼 해결사가 돼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의뢰인들이 이혼할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돕는다. 그러면서 잃었던 자신의 진짜 삶에 다가선다. ‘웰컴투 삼달리’ 조삼달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자신의 곁에서 응원하고 지지하던 가족과 친구들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남들만큼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매일매일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애를 쓴다.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 깊숙한 어딘가에 파묻혀 스스로를 잃어버리거나 번아웃에 허덕이며 우울증과 자괴감으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은 쉬지 않고 일만 지속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며, 성공을 위해 미치도록 내달릴 의무도 없다. 나를 돌아보고, 당연하게 여겼던 주변의 소중함을 새기는 시간. 누구에게나 쉼의 시간은 필요하다. ‘닥터슬럼프’에서 일출을 보러 강원도 속초에 갔다가 흐린 날씨로 해를 못 보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때 나온 내레이션이 인상적이다. “비록 오늘은 해가 뜨지 않았지만, 내일은 뜰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른 채 뜨지 않는 해를, 그럼에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우리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다.

필자 박현민은 잡식성 글쓰기 종사자이자, 14년 차 마감 노동자다. 가끔 방송과 강연도 하며, 조금 느릿하더라도 밀도가 높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나쁜 편집장』을 포함해 총 3권의 책을 썼다.
필자 박현민은 잡식성 글쓰기 종사자이자, 14년 차 마감 노동자다. 가끔 방송과 강연도 하며, 조금 느릿하더라도 밀도가 높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나쁜 편집장』을 포함해 총 3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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