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스파이, 그들이 온다

프라이버시 뒤 숨어 비밀 나르는 스파이

입력 2024. 01. 14   13:34
업데이트 2024. 01. 1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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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그들이 온다
잠금장치 없는 방첩…줄줄 새는 정보  

러시아에 기밀 팔아넘긴 BND 간부

정보·돈 전달 기업인 등 피고인 2명
독일 이례적으로 비공개 재판
자유 침해 앞세워 정보기관 권한 제한
서방의 러시아 제재 리스트 등
3년간이나 1급 비밀 새는 줄 몰라
예산 확대·법적 권한 부여 등
안보·국익 지킬 대응 나서야

사진=게티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2023년이 저물어 가던 지난달 13일 독일 베를린에서는 이례적으로 엄격한 보안조치 속에서 특별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기자들은 법정에 입장하기 전 두 번에 걸쳐 검색을 받아야 했는데, 컴퓨터와 휴대폰은 물론이고 장식품이나 펜조차도 휴대할 수 없었다. 법원이 준비한 펜만 사용해야 했으며, 심지어 주심 판사도 입장 전에 시계를 풀어야만 했다. 판사는 검사의 공소장 13페이지 중 3페이지는 공개하지 못한다며 아예 읽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재판이기에 민주주의 사법절차의 기본인 재판 공개의 원칙에도 예외를 둔 것일까?
피고인은 두 명인데 한 명은 독일 해외정보기관 BND의 고위 간부로 러시아 정보기관에 포섭돼 1급 비밀을 러시아에 유출한 혐의이고, 두 번째 피고인은 기업인으로 첫 번째 피고인과 러시아 정보기관 사이를 오가며 정보와 돈을 전달한 혐의다. 러시아에 유출된 주요 정보는 서방 정보기관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 중인 러시아 용병 바그너 그룹의 암호화된 메시징 서비스를 감청하고 있다는 사실,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무기의 수량과 배치장소 및 이동경로, 독일 정보기관의 러시아 정보요원 감시 상황 등으로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공개될 경우 적을 이롭게 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재판은 수개월간 지속될 예정으로 추가 내용이 밝혀지겠지만, 이미 정부와 정치권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정보기관의 문제점과 개혁 필요성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스파이가 된 BND 고위 간부 

프라이버시 보호 조항에 의해 ‘카르스텐 L’로만 알려졌던 스파이 혐의자는 뉴욕타임스 등 언론의 추적으로 독일 해외정보기관 BND의 기술정찰국 국장 출신 카르스텐 링케(53)로 밝혀졌다. 감청과 사이버 등 기술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기술정찰국은 BND 정보의 절반을 생산하는 중요 부서이다. 그는 독일 연방군 대령으로 근무하다 2007년 BND로 전직하여 15년 이상 재직하면서 1급 비밀을 취급해 왔는데, 동맹국 정보기관들의 민감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조사과정에서 그가 이미 군 재직 때부터 극우 성향을 지녔던 것이 알려지면서 이를 감지하고도 관대하게 넘어간 군 방첩기관(MAD)과 BND에 대한 비난 여론도 일고 있다고 한다. 그는 2021년 5월 친러시아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 멤버가 주선한 파티에서 보석 관련 사업을 하는 러시아 출신 독일인 아더 E.(성은 공개되지 않음)를 만나 친해진 후 그로부터 독일 영주권을 원하는 러시아 부호를 도와주면 아프리카 광산 수익의 일부를 나눠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이후 독일을 방문한 러시아 부호와 직접 만나 영주권 주선을 논의하였는데, 그가 러시아 정보기관인 FSB의 중요 인물들과도 친하다며 돈을 벌 기회를 만들어 주겠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이들 세 사람의 관계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더욱 발전하였는데 러시아 측이 처음 요청한 자료는 서방의 러시아 제재 리스트였다고 한다. 2022년 9월에는 링케가 러시아 부호에게 전하라며 봉투를 줬고 아더 E.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를 전달했는데 그곳에는 ‘루비얀카(FSB본부가 있는 지역) 사람들’로 불리는 일행들이 함께 있었다. 며칠 후 FSB 요원들이 12개의 질문사항을 종이에 적어오자 아더 E.는 이 종이를 휴대폰으로 찍어 링케에게 보냈다. 이 사진은 나중에 링케의 휴대폰에서 발견돼 증거로 채택됐다. 질문에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하이마스(HIMAS) 다연장로켓을 몇 대 지원하였는지, 배치된 장소는 어디인지, GPS는 지속 작동하는지,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방공시스템(IRIS-T)의 이송 경로는 어떻게 되는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링케는 BND의 내부 자료들을 아더 E.를 통해 모스크바에 전달했으며, FSB는 암호통신이 가능한 휴대폰을 이들 세 명에게 전달하여 직접 통화할 수 있도록 했다. 그해 10월에는 FSB가 아더 E.를 모스크바로 불러 링케에게 전달하라며 4개의 봉투를 줬다. 하지만 독일 입국 때에는 공항 BND 요원의 도움으로 세관 검색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봉투에는 40만 유로의 현금이 들어 있었으며, 이는 얼마 안된 스파이에게 주는 보수치고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해당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전쟁 관련 정보에 다급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링케의 첩보가 그만큼 가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동맹국 정보기관으로부터 두더지(내부첩자)가 있다는 첩보를 받은 BND는 2022년 12월 자체 조사를 통해 링케를 찾아냈고, 뉴스가 공개된 후 아더 E.는 러시아로 들어오라는 지시를 받고도 미국으로 도주했다가 마이애미에서 FBI에 체포되었다. 독일 당국에 넘겨진 그는 단순 연락책일 뿐이었다며 수사에 적극 협조하였는데 독일 유력지 슈피겔은 오히려 그가 처음부터 FSB에 포섭되어 링케에게 접근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고 지적하였다. BND 간부와의 친분 조성, 금전을 통한 관심 끌기, 제재 리스트 등 비밀이 아닌 문건을 요청한 후 서서히 요구 수준을 높여나간 사실 등이 전형적인 스파이 포섭 방법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한편, 정보기관 전문가인 마르부르크 대학 볼프강 크리거 교수는 “동맹 정보기관들의 정보까지 유출되었을 경우에는 그들 스파이의 신원과 정보수집 기법이 노출되는 등 치명적 결과가 초래될 수 있어 향후 BND의 동맹국 정보기관 협력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독일의 대외정책 선회 및 방첩 혁신 

독일은 사건 직후인 2023년 1월 우크라이나에 14대의 레오파드 전차를 지원키로 하는 등 그동안 러시아를 의식한 소극적인 우크라이나 지원 태도에서 선회했다. 러시아 천연가스에 의존하던 전 정부의 에너지 정책도 전면 재검토 중이다. 국회의원들도 러시아의 공세적 정보활동에 강력한 대응을 주장하고 있는데, 정보위원장인 콘스탄틴 폰 낫츠는 “우리는 방첩에 대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정보기관 혁신을 주장했다. 사실 독일은 지속적인 러시아의 정보적 위협 속에서도 방첩을 소홀히 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9년 9월 대낮에 베를린 한복판 공원에서 체첸 출신 반러시아 인사가 FSB 암살자의 총격에 살해되었고, 2021년에는 러시아 군 정보기관인 GRU가 독일 의회를 해킹하기도 했다. 독일은 과거 나치의 전체주의와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의 주민탄압 경험으로 인해 정치인들이 시민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만을 강조하며 정보기관의 권한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경향이 깊어 왔다. 또한 많은 독일 리더들은 2차대전 때 러시아 침공을 반성하며 러시아와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 경제적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BND 간부 출신이며 런던 킹스칼리지 교수인 게르하르트 콘라드는 “독일 정책 결정자들은 오랫동안 정보기관의 조언을 무시해 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독일 정부는 정보기관의 예산을 늘리고 임무수행에 대한 법적 권한을 최대한 부여하는 등 전면적인 개선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시아의 위협으로 인식이 크게 바뀐 것이다.

우리나라도 과거 군사정부 시절의 정보기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기반으로 아직도 정보기관 권한을 축소하는 것이 시민의 권익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 치열해진 국가 간 정보전 상황에서 이제는 우리도 정보기관이 국가안보와 국익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제도의 개선과 지원이 필요하다.

필자 배정석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국가정보원에서 방첩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국제정보사학회와 한국국가정보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배정석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국가정보원에서 방첩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국제정보사학회와 한국국가정보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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