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끝과 시작

입력 2023. 12. 27   15:30
업데이트 2023. 12. 2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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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안 소설가
최유안 소설가



가로수 잎이 어느새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드러난다. 겨울이 깊어 가는구나. 나는 높낮이가 다른 나목이 일렬로 서 있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연은 인간보다 진실하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밤이 두려워 빛을 밝히지만, 자연은 밤이면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그래서 거스르지 않는 일에는 ‘자연스럽다’는 말이 붙는다.

올 12월 날씨는 매일같이 변덕스러웠다. 함박눈이 내리다가 갑자기 햇볕이 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거리의 사람들을 환하게 비추곤 했다. 심한 날씨 변화에 단풍도 계절을 가늠하지 못하는지 초록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나뭇잎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풍경을 보며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지만 글 쓰는 것이 매일 즐겁지는 않다. 어떤 날은 글이 잘 써져 금방이라도 그 세계에 들어가지만, 어떤 날은 글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워 한참 주저하고만 있다. 겨울의 밤처럼 길고 지난한 시간은 자주 나를 찾아든다.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거리에 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나목들을 바라보는 동안 소설책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려 나뭇가지 위로 쌓여 갔다. 그때 갖고 있던 마음은, 어서 글을 써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었다. 깊은 어둠을 잘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깊이 침잠해 있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내게는 더 중요했다.

그런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힘에 부칠 때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견디느냐가 내게는 여전히 중요하다. 시련을 겪거나 아픈 일을 견디며 쌓은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음을 도모하게 한다. 그렇게 도모한 시간 속에서도 언제든 고난은 다시 온다. 그리고 아무리 깊은 겨울날에도 햇볕은 든다.

얼마 전 출간한 『먼 빛들』에는 나름의 일을 겪은 인물들이 한데 모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멀리서 내려온 빛이 각각의 눈앞에 쏟아져 인물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같은 빛을 바라본다. 인물들 간에는 서로 친분이 없다. 낯선 이들이 한데 모여 서로 이상한 위로를 받는 그 장면을 책의 결말로 쓸 때 나는 잠시 안도했다.

인물마다 자신들이 겪었던 고뇌의 순간을 그렇게나마 잠시 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고뇌의 순간들을 함께 겪어 내며 다시 나아간다. 혼자가 아니라서 또 일어날 수 있곤 한다.

겨울을 지나는 일이란 그런 것 같다. 우리는 매번 어느새 깊은 겨울 안으로 들어가고야 만다. 시린 바람과 쨍한 추위는 몸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힘에 부치는 날이 찾아온다면, 거리의 나무들을 한 번만 바라봐 주시라. 우리와 같은 시간을 보내는 그들은 모진 날들을 그저 견딘다. 앙상하게 마른 모습이지만 죽지 않는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뿌리 안쪽 깊은 곳부터 스스로 다진다.

당신이 늘 누군가와 모르는 새 연결돼 살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처럼 나무에게는 바람이, 공기가, 물이, 그리고 곁에 있는 나무들이 서로를 겯어 주며 따뜻해질 날을 기다린다.

봄이 있으면 겨울도 있다. 겨울의 끝에는 늘 봄이 온다. 시작은 다시 끝이고, 끝은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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