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인간

전쟁의 고통이 증오의 재생산에 이용되지 않기를…

입력 2023. 12. 27   16:05
업데이트 2023. 12. 2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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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고통을 견디게 한 글쓰기-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끝>

2차 대전 중 쌍둥이 형제의 잔혹한 운명
협박·살인…거친 삶 끝에 국경서 이별
50년 만의 재회도 감격 아닌 비극으로
격동의 유럽 현대사 겪은 헝가리 작가
성장기 경험 토대로 쓴 충격의 3부작
뒤엉킨 거짓과 진실로 처절한 생존 그려

2013년에 제작된 영화의 한 장면.
2013년에 제작된 영화의 한 장면.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 고통에 직면한 인간은 그것을 기어이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많은 거짓과 환상은 그렇게 생성된다.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은 학살과 파괴를 불가피한 희생으로 포장하고, 맹목적인 증오를 애국심으로 치환하는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인간은 고작 그런 일을 한다. 헝가리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1936~2011)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평생 글쓰기로 고통에 맞서 몸부림 친 작가의 체험이 토대가 된 아픈 소설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1부 ‘비밀 노트’, 2부 ‘타인의 증거’, 3부 ‘50년간의 고독’이라는 3개의 소설로 구성된다. 세 소설은 각기 독립적이지만 긴밀하게 연결된다. ‘비밀 노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시기 헝가리의 작은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한 어머니가 자신의 쌍둥이 아들들을 친정에 맡긴 채 떠난다. 여기서 쌍둥이 소년들은 이름 없이 ‘우리’로 호명된다. 할머니는 쌍둥이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일을 하지 않으면 밥을 굶기는 지독한 구두쇠였다. 쌍둥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노동하고, 고통에 맞서 자신들의 정신을 단련한다.

그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자기들끼리 작문 공부를 해서 ‘비밀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전쟁의 공포에 맞서 쌍둥이들은 자기들만의 도덕을 만든 다음 그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모욕적인 말들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훈련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작했다.” 그들은 거짓말, 협박, 심지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감정이 마비된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찾아온다.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아버지는 국경에서 사살되고 쌍둥이 중 한 명은 국경을 넘어간다. 아버지의 시신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생이별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표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표지.



‘타인의 증거’는 홀로 남은 동생의 이야기다. 두 사람의 이름은 철자가 같고 순서만 바뀌었다. 쌍둥이 형 클라우스(Claus)가 떠난 후 홀로 남겨진 루카스(Lucas)는 극도의 외로움에 시달린다. 루카스는 아버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임신한 아스핀이라는 여자를 만나 그녀와 꼽추 아들 마티아스를 돌봐 준다. 전쟁은 끝났지만 냉전으로 유럽은 둘로 나뉘었다. 루카스가 사는 작은 마을은 고립된 채 쇠락해 가고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꼽추 마티아스는 작문 노트를 불태운 뒤 자살하고, 언젠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지닌 서점 주인 빅토르는 누나를 목 졸라 죽인 뒤 사형당한다. 전쟁 중 남편을 잃고 우울증에 걸린 여인 클라라, 불면증 환자 미카엘…. 루카스는 자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노트에 꼬박꼬박 기록한다. 그리고 2부의 말미에 클라우스가 돌아온다.

마지막 3부 ‘50년간의 고독’에는 어린 시절 살았던 헝가리 마을로 돌아온 클라우스가 기억을 풀어 가는 과정이 나온다. 클라우스도 극심한 외로움 속에 자신의 쌍둥이 형제를 그리워하며 이야기를 써 나가면서 살아왔다. 50년 만에 마을로 돌아온 클라우스는 ‘루카스 클라우스’라는 필명을 쓰는 시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찾던 동생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두 형제는 감동적으로 재회하는 데 실패한다. 루카스를 만난 클라우스는 그가 자신의 혈육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돌아가기 전 클라우스는 루카스에게 자신이 쓴 원고를 건네주고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3부에서 두 사람의 이름은 1인칭으로 바뀌고, 2부 내용이 모두 허구라는 사실이 암시된다. 그리고 쌍둥이 형제의 이름이 구분되지 않고 사용된다. 독자들은 1부와 2부의 연결된 이야기가 모두 전복되고 두 사람을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혼란에 빠진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연합뉴스
아고타 크리스토프. 연합뉴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36년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헝가리 국경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전쟁에 끌려갔고, 어머니는 채소와 가축을 키우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이 시기 작가는 오빠, 남동생과 함께 자유롭게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성장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1부 ‘비밀 노트’의 토대가 됐다. 그녀는 14세 때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 각별한 사이였던 오빠와 떨어지게 됐다.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헝가리 정부는 기숙학교에서 혹독한 마르크스주의 교육을 시켰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정부에 강렬한 반감을 갖게 됐다. 1956년 소련 전차부대가 헝가리 국경을 넘었다. 그녀는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소련군을 피해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로 도피했다. 하지만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익힐 시간이 없었다. 스위스의 시계공장에서 하루 10시간씩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대학에 진학해 프랑스어를 배운 그녀는 헤어진 오빠를 ‘클라우스’로, 자신을 ‘루카스’로 설정해 글을 써 나갔다. 1986년 프랑스에서 『비밀 노트』가 출간됐고 20여 국에 번역되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1988년 『타인의 증거』, 1991년 『50년간의 고독』이 출간됐고 세 작품은 한 권의 책으로 엮였다. 3부작의 주요 배경이 되는 제2차 세계대전과 헝가리 민주화운동, 사회주의체제 붕괴 등은 바로 유럽의 현대사이자 작가의 인생이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어느 헝가리 작가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다. 전쟁으로 고향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 낯선 땅에 정착해야 했던 사람들, 전쟁 이전의 삶을 끝내 되찾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전쟁의 기억은 아직도 증오의 재생산에 이용되고 있다. 

정전 70주년인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4년 동안 전쟁의 비극을 겪은 인간들의 다양한 사연을 매주 기록했다. “가장 슬픈 책보다도 더 슬픈 게 인생이니까요. 맞아요. 책이 아무리 슬프다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말을 적어 둔다. 사람들이 부디 전쟁의 고통을 잊지 않기를 기원한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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