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인간

시대를 선택할 수 없었던 이방인들의 억척 생존기

입력 2023. 12. 20   15:06
업데이트 2023. 12. 2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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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이민진, 『파친코』

재일 한국인 ‘자이니치’의 역경과 시련
일제강점기부터 4대에 걸친 가족사
작가도 미국서 자라며 숱한 차별 겪어
“정해져 있는 듯해도 희망의 여지 있어”
삶을 불확실성에 기대는 파친코에 비유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첫 문장에 암시됐듯이 이 소설은 대를 이어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통스럽게 사는 게 여자의 운명인갑다. 우리 여자들은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다아이가.” 1911년, 소작농의 딸 ‘양진’은 가난 탓에 돈을 받고 쫓기듯 구순구개열(언청이) 장애에다 다리까지 불편한 어부의 아들 ‘훈이’와 결혼한다. 그러나 양진은 착한 남편과 다정한 시부모에게 금방 정을 붙인다. 곧 부부는 딸 ‘순자’를 얻었다. 훈이는 정상으로 태어난 딸 순자를 끔찍이 아낀다. 순자는 어머니 양진으로부터 넉넉한 인품과 타고난 부지런함, 야무진 살림 솜씨, 강인한 적응력과 끈질긴 생명력을 배우며 성장했다. 순자가 13세 되던 해, 훈이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순자와 양진은 하숙을 치며 꿋꿋하게 생계를 이어간다. 

10대 후반이 된 순자는 생선 중매상이자 일본 고리대금업자의 사위인 ‘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순자는 한수가 유부남이란 사실을 모른 채 아이까지 갖게 된다. 한수가 자신의 첩이 될 것을 권유하자 순자는 결연히 거부한다. 순자는 하숙집에 머물던 목사 ‘이삭’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게 된다. 이삭은 순자의 사연을 알면서도 그녀를 지켜 주기 위해 기꺼이 결혼을 하고, 순자가 낳은 아들 ‘노아’를 자신의 자식처럼 돌본다. 오사카 이카이노의 공장에서 일하는 이삭의 형 ‘요셉’은 순자가 탐탁지 않았지만 곧 순자의 생활력에 감복한다. 한수는 오사카에서 순자의 곁을 맴돌며 자신의 아들 노아를 주시한다. 순자와 이삭 사이에 아들 ‘모자수’가 생긴 이후 이삭 부부는 더욱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일본에서 조선인들의 삶은 순탄할 수 없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종교적 신념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삭은 감옥에서 고문받다가 사망한다. 형 요셉도 원자폭탄에 피폭된 뒤 후유증을 앓게 됐다. 광복이 됐음에도 조국은 곧 둘로 나뉘었고 전쟁까지 발발하자 순자는 일본에 발이 묶였다. 순자는 한수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하면서 홀로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 낸다.

첫째 아들 노아는 학교에서 조선인이라고 무시당하면서도 끈질기게 공부해 명문 와세대대에 진학한다. 그러나 노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한수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어머니에게 격렬한 반감을 갖게 된다. “어떻게 엄마가 제 인생을 망쳐 놓을 수가 있죠? 어떻게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할 수 있냐고요? 어리석은 엄마에 범죄자 아버지라니, 난 저주받았어요.” 그는 자신이 아무리 명문대를 나와도 끝내 혈통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노아는 나가노로 떠나 ‘노부오’라는 이름의 일본인으로 살다가 훗날 자살하고 만다. 둘째 아들 모자수는 형과 달리 조선인을 멸시하는 일본인들에게 폭력으로 대응한다. 모자수는 대학을 포기하고 파친코 게임장 지배인으로 일하며 돈을 모은다. 파친코는 많은 ‘자이니치(재일 한국인)’가 선호하는 업종으로 다른 업종에 비해 일본인의 편견과 멸시가 상대적으로 적은 분야였다. 파친코에서 돈을 모은 모자수는 매춘부의 딸 ‘유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유미는 언젠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재봉일을 하며 살아가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광복과 전쟁 이후 일본에 살던 많은 한국인이 북한이나 남한으로 돌아갔지만, 유미는 남북한 어디에도 애착을 갖지 않았다. 유미는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을 마치 끔찍한 장애물처럼 여긴다. 하지만 유미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래도 모자수는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 일본 사회에서 억척스럽게 생존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형 노아와는 달리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2022년 디즈니+에서 방영한 드라마 ‘파친코’의 한 장면.
2022년 디즈니+에서 방영한 드라마 ‘파친코’의 한 장면.



모자수는 아들 ‘솔로몬’을 통해 아내 유미의 꿈을 실현하려고 한다.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 엘리트 지식인으로 성장시켜 그동안 일본에서 받았던 온갖 편견과 멸시를 보상받고 싶어 한다. 솔로몬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국제학교를 다니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외국 은행에서 일하게 된 솔로몬은 자신의 핏줄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하지만 솔로몬은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주류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경험을 반복한다.

“모자수는 인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게임에 손님들이 빠지는 이유를 모자수는 이해할 수 있었다.”

1933년, 순자와 이삭 부부가 처음 일본에 발을 디딘 이후 56년이 지난 1989년에도 여전히 재일 한국인들은 3년에 한 번씩 지문을 찍어 신분증을 갱신해야 했고, 공무원으로 채용되지 않았으며, 도쿄의 고급 아파트에도 거주할 수 없었다. 자이니치는 결코 ‘평범한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양진과 딸 순자, 모자수와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이야기가 펼쳐지는 『파친코』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살아갈 시대를 선택할 수 없었던 자이니치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한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비극으로 얼룩졌는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마지막에 순자는 남편 이삭의 묘를 찾아간다. 그녀는 비석 앞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누구도 세상에서 환대받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억울하고, 비통한 삶의 이력을 지닌 자들이다. 작가 역시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숱한 차별을 겪으며 성장했다. 그녀는 예일대 재학 시절 우연히 자이니치 역사에 관한 강연을 들은 후 그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이 소설을 쓰면서 과거의 아픔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파친코』는 자이니치를 다룬 소설이지만,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슬픔은 모두 어딘가 닮았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첫 문장을 다시 읽으며 누군가의 슬픔을 생각한다. 순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고.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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