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인간 -
너무 늦어버린 사과와 전쟁의 비극 -이언 매큐언 『속죄』
거짓 증언에 강제 이별한 연인, 전쟁 포화 뚫고 재회하는 감동 스토리
하지만…
알고 보니 유명 작가 된 고발자가 죄책감에 해피엔딩으로 쓴 참회 소설
실제로는 못 만나고 희생…충격적 반전으로 ‘때늦은 속죄’ 경계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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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서로의 죄를 목격하면서 살고 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죽게 내버려둔 적도 없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뒀나.” 모든 인간은 먹고 배설하고 어김없이 죄를 짓고 살아간다. 살아갈수록 인간은 점차 타인에게 준 상처에 둔감해진다. 우리는 상처를 준 다음 곧 상대에게 사과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속죄할 기회를 쉽게 놓치고 만다. 이런 ‘나’처럼 당신도 역시 그렇지 않은가. 모두 죄를 짓고 살아간다는 사실은 기이한 안도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어떤 상처는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기도 한다.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1948~ )의 대표작 『속죄』(2001)는 타인에게 속죄할 기회를 놓친 어느 작가의 이야기다.
『속죄』의 주인공은 13세 소녀 ‘브리오니 탈리스’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쓴 동화와 희곡을 친척과 이웃들에게 자랑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브리오니는 일종의 결벽증이 있다. 브리오니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질서정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소녀였다. 193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 상류 귀족들은 마지막 좋은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연회를 즐겼다. 브리오니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연회에서 교양을 과시하는 어른들은 브리오니가 쓴 글과 연극을 보면서 덕담을 주고받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온 브리오니의 언니 ‘세실리아’는 뭔지 모를 답답함에 시달렸다. 자신의 소꿉친구이자 탈리스 집안에서 오랫동안 일한 가정부의 아들인 ‘로비 터너’ 때문이다. 세실리아는 로비를 사랑하고 있었다. 영민한 로비는 런던의 의과대학에 합격해 곧 떠날 예정이었다. 학비는 탈리스 집안에서 대주기로 했다. 로비도 세실리아를 사랑했지만, 신분적 차이 때문에 거리를 둔다. 어느 여름날, 자신을 피하는 로비를 마주친 세실리아는 그동안 쌓아 온 감정이 폭발해 옷을 벗고 정원의 분수대에 뛰어든다. 브리오니는 건물 위층 창문에서 언니의 ‘이상한 행동’을 훔쳐본다.
그날 저녁 탈리스가에선 연회가 벌어진다. 어른들이 모두 응접실에 모이자 세실리아는 아버지의 서재로 로비를 불러낸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서재에서 뜨겁게 포옹한다. 서재 구석에서 책을 보던 브리오니는 언니와 로비의 행동을 보고 다시 놀란다. 그날 연회가 끝날 무렵 친척 아이가 사라지고, 브리오니의 사촌언니인 롤라가 아이들을 찾으러 나갔다가 누군가에게 강간당한다. 탈리스가는 발칵 뒤집힌다. 어두운 밤이어서 경찰은 목격자를 찾지 못했다. 그때 브리오니가 나선다. 언니와 이상한 행동을 했던 로비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브리오니는 두 사람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진술한다. 이 사건으로 로비는 구속되고, 의과대학 입학도 취소된다. 세실리아는 로비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법원의 판결은 바뀌지 않는다. 당시 계급적인 편견은 그토록 견고했다. 그리고 “진실은 허구만큼이나 붙잡을 수 없는 유령 같은 것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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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2부에서는 프랑스 북부 해안에서 위기에 몰린 영국군 부대가 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지상군이 부족했던 영국 정부는 감형을 조건으로 죄수들을 입대시켰다. 하루빨리 세실리아를 만나고 싶었던 로비는 원정군에 자원했다. 그러나 로비가 소속된 부대는 크게 패하고, 영국군은 프랑스 북부 해안지대에 고립된다. 로비와 동료들이 겨우 도달한 해안에는 수십만 명의 패잔병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비에게 유일한 희망은 세실리아의 마지막 말이었다. 수갑을 차고 경찰차에 오르던 로비에게 세실리아는 말했다. “기다릴게, 돌아와.”
한편 18세가 된 브리오니는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뒤늦게 깨닫는다. 그녀는 부상한 군인들을 돌보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려 애쓴다. 브리오니는 잘못을 빌기 위해 언니를 찾아간다. 세실리아는 자신을 기다리라는 로비의 편지를 간직한 채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얼마 후 ?케르크에서 무사히 탈출한 로비는 세실리아와 재회한다. 두 사람의 재회를 보고 브리오니는 안도한다. 참혹한 전쟁도, 어이없는 거짓말도 두 사람의 사랑을 갈라놓지 못했다.
그러나 이 행복한 결말은 3부에서 처절하게 뒤집힌다. 2부의 내용은 훗날 작가가 된 브리오니의 소설이었다. 진실은 가혹했다. 로비는 ?케르크로 후퇴하던 중 총상을 입고 프랑스 북부 브레이듄스에서 전사한다. 로비를 기다리던 세실리아도 독일군의 폭격으로 사망한다. 두 연인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브리오니는 몇 번이나 ‘속죄’라는 소설을 다시 쓰면서 두 연인을 애도한다. 그녀는 교과서에 작품이 실릴 정도로 유명한 작가가 됐지만 끝내 그들에게 사과할 시기를 놓쳤고, 진실도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할 시간을 스스로 정할 수 없다. 모든 세계는 갑자기 붕괴하지 않는가. 전쟁은 무수한 기회를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꿔 버린다. 집단으로 죄를 짓고, 그것을 국가·민족·이데올로기·종교 등으로 합리화한다. 가혹한 각자도생의 시대, 전쟁과 광기가 여전히 휘몰아치는 시대에 이 소설이 주는 울림은 크다. 이 소설은 자신이 타인에게 준 상처와 속죄의 어려움을 생각하게 한다. 모든 속죄가 용서받을 수는 없다. “인생이라는 이야기는 얼마나 빨리 끝나 버리는가. 압도되지도 않고 허무하지도 않았다. 다만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잔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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