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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도 두려워도… 오늘, 이 순간을 사랑하라

입력 2023. 11. 27   16:52
업데이트 2023. 11. 2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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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뮤·클 이야기 - 뮤지컬 ‘렌트’ 

“엔젤로서 마지막” 20년 함께한 김호영

독보적인 연기로 존재감 끌어올려

불안정함 더한 김환희 ‘미미’도 신선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 모티브
아름다운 합창곡·장면으로
사랑·포용의 메시지 전해

 

뮤지컬 ‘렌트’의 한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뮤지컬 ‘렌트’의 한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대사와 장면, 잔뜩 화가 나 있는 캐릭터들. 구질구질한 일상, 내일이 보이지 않는 인생, 에이즈와 죽음의 그림자. 

이것들만 보였다면 렌트는 당신에게 최악의 불행한 작품이 될지 모른다. 반면 이 낯선 공간의 공기로 조금씩 숨을 쉴 수 있게 되고, 하얀 가루가 잔뜩 묻은 포장을 찢어버릴 수 있다면, 이 멋진 작품의 창조주 조너선 라슨의 유언장을 들고 당신을 뮤지컬의 천국으로 안내할 ‘엔젤’과 조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랜만에 본 렌트는 그대로였지만, 객석의 나는 조금 더 나이를 먹었다.

슬로건처럼 피부 밖에서 이해되었던 ‘노 데이 벗 투데이(No Day But Today)’는 이제 종교의 경전처럼 안으로 스며들어와 일상의 혈관을 확장시켜준다. 어제는 이미 사라졌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이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렌트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역시 2막을 여는 ‘시즌 오브 러브(Seasons of Love)’일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세상 사람에게 독도가 울릉도 동남쪽 200리, 동경 132 북위 37 평균기온 12도에 강수량이 1300인 것처럼 ‘1년은 52만5600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 준, 모든 배우들이 커튼콜 하듯 일렬로 서서 부르는 너무나 아름다운 합창곡.

연출가 앤디는 “이 넘버는 엔젤을 추모하는 노래”라고 했다. 물론 아직 엔젤이 죽기 전이지만 수긍할 수 있는 해석이다.

서두에서 열거한 것들은 사실 렌트만이 가진 오리지널의 향기이자 맛이다. 의미 없이 나열되는 대사, 여기저기 찢어진 장면들을 되는 대로 이어 붙여 놓은 듯한 캐릭터의 등장 장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대사, 조울증에 걸린 듯 감정이 휘청거리는 인물들.

이 모든 것들은 마치 바그너 오페라의 불길한 베이스처럼 렌트의 발밑에 깔린다. 지진의 전조증상과 같은 이것들의 정체는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뮤지컬 ‘렌트’의 한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뮤지컬 ‘렌트’의 한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인간이 가진 가장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감정은 분노일 테지만, 나는 이 분노의 진짜 먹이가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분노를 꺼트릴 수 있는(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일한 감정은 ‘사랑’뿐이다. 그리고 사랑의 결과는 희생이다. 사랑하는 누군가, 무언가를 위해 나선 사람에게 두려움을 쥔 분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작품에서 사랑을 명시하고 있는 두 캐릭터는 거리의 드러머 ‘엔젤’과 클럽댄서 ‘미미’다. 김호영의 ‘엔젤’에게선 카라얀의 1960년대 베토벤 교향곡 전집과 같은 권위가 느껴진다. 그는 2002년 엔젤 역으로 뮤지컬 데뷔했고, 20년간 다수의 시즌에서 엔젤을 연기한 국내 최고의, 어쩌면 세계적인 ‘엔젤 장인’이다. “이번이 마지막 엔젤”이라고 못을 박아 둔 만큼 그의 엔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김호영은 지금까지보다 좀 더 확장된 해석을 보여준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한 편의 굿판 같다. 남은 자들이 뒷주머니에 욱여넣고 있는 슬픔, 불안, 공포, 증오의 감정들을 자신의 죽음이라는 큼직한 상자에 모아 담는다. 마치 “내가 다 가져갈 테니, 오늘만큼은 다들 행복하게 살아”라는 것만 같다. 그래서 라슨은 이 캐릭터에게 엔젤이라는 이름을 주었을까.

김환희의 ‘미미’도 신선하기 그지없다. 많은 미미들이 ‘당당함’과 ‘섹시’라는 두 원료를 각자의 해석에 따라 배합해 캐릭터를 내보였다면, 김환희는 여기에 10대 가출 소녀와 같은 불안정함을 더해 미미라는 캐릭터의 윤곽을 더욱 정밀하게 깎았다. 당당함과 섹시 뒤편에 웅크리고 있는 미미의 사랑, 아픔, 두려움, 나약함이 대사, 움직임, 노래에 만져질 듯 선명하게 묻어 있다.

알려져 있듯 뮤지컬 렌트의 모티브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에서 가져왔다. 1막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명넘버 ‘La Vie Boheme’은 원작 오페라에 대한 오마주처럼 들리기도 한다. 여주인공 ‘미미’는 유일하게 오페라와 뮤지컬에서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다. 이웃에 사는 미미가 촛불이 꺼져 불을 얻으러 왔다가 로저(오페라에서는 로돌포)를 만나는 장면은 오페라와 뮤지컬 모두 명장면이다. 이때 미미가 부르는 넘버가 유명한데 라보엠은 ‘내 이름은 미미’, 렌트에서는 ‘라이트 마이 캔들(Light My Candle)’이다.

오페라와 뮤지컬의 극적인 차이는 미미의 죽음일 것이다. 라보엠에서는 미미가 죽지만 렌트에서는 죽었다가 살아난다. 그리고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빛나는 터널을 따라간 끝에서 죽은 엔젤을 만났고, 엔젤은 미미에게 “돌아가서 로저의 노래를 들어라”고 했다는 것.

이는 어쩐지 디즈니적인 결말이다. 미미의 ‘부활’에 렌트의 극작가이자 작곡가인 조너선 라슨은 자신의 간절한 무언가를 심어놓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죽음조차 극복해낸 사랑. 이들의 사랑이 당신의 사랑과 생김새는 다를지라도, 그 본질은 같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뜨겁게,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날은, 오직 오늘뿐이라는 것.

세계 뮤지컬사의 명작으로 남은 렌트는 1996년 1월 26일 미 오프브로드웨이 150석의 작은 공연장에서 초연됐지만, 라슨은 개막을 하루 앞두고 대동맥 박리로 생을 마감했다. 과연 그는 터널의 끝에서 ‘엔젤’을 만났을까.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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