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과 미군 잇는 소통의 징검다리
자유·평화 향한 하나 된 마음 44년간 변함없이 솔직하게 전해
한미 간 공보 관련 의견조율 임무 수행
판문점 현장 취재 지원만 1000번 이상
퇴임 후에도 한미동맹 이바지 지속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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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의 산증인이다. 44년간 한결같이 한국군과 주한미군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 왔다. 판문점과 한미 연합훈련 등 내외신 취재기자들의 현장에는 그가 항상 있었다. 김영규(76) 전 주한미군사령부·한미연합군사령부·유엔군사령부 공보실 소속 공보관 이야기다. 김 전 공보관은 지난달 31일 인생의 반 이상을 보낸 일터를 나섰다. 그는 퇴임 첫 소감으로 “매일 뉴스를 챙겨 보며 긴장하던 데서 벗어난 게 후련하지만 아직은 실감 나지 않는다”고 전했다. 지난 8일 서울 모처에서 그를 만나 주한 미 공보관으로서의 삶과 한미동맹에 관한 생각 등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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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 전역 후 미 군무원으로 정식 채용
김 전 공보관은 영문학 교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학창 시절 영어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1976년 6월 군에 입대했다. 이후 카투사로 차출돼 미2사단 공보실에 배속되면서 미군과 인연이 시작됐다. 격주로 발행하는 미2사단 기관지인 ‘인디언 헤드(Indian head)’의 기자 시험을 통과한 뒤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상병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군의 도움을 받으며 영문기사를 작성했다. 일찌감치 그의 실무 능력과 됨됨이를 알아본 미군 간부는 김 전 공보관이 전역 후에도 부대에 계속 남기를 희망했다. 1978년 11월 전역한 그는 이듬해인 1979년 3월 미 군무원으로 정식 채용됐다.
“이전에는 영어 원서만 읽는 정도였는데, 카투사 때 개리 블룸필드라는 미군 기자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혼혈아 문제를 같이 다루고, 이 기사로 인해 주한미군에서 혼혈인협회를 만들어 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죠. 이 인연으로 50여 명의 혼혈아에게 경기도 동두천 샬롬하우스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보람된 일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작가로 활동 중인 블룸필드 씨와는 현재까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40년 넘게 우정을 다져 가고 있다.
44년간 한결같은 일상을 보낸 김 전 공보관의 하루는 어땠을까. 그는 오전과 오후 하루 두 번,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주한미군 또는 국방·안보 관련 뉴스를 꼼꼼히 정리해 매일 지휘부에 보고했다. 이는 단순히 기사 스크랩 수준이 아니었다.
김 전 공보관은 “가능한 한 지휘부가 한국 사회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며 “내외신기자들에게는 주한미군 관련 질문을 받아 성실히 답변해 줬다. 특히 한미 연합훈련이 있으면 꼭 현장에 나가 취재 지원을 했다”고 자신이 해 왔던 일을 소개했다.
책으로 몇 권 낼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다는 김 전 공보관은 그중에서도 2002년 발생한 ‘효순·미선이 사건’을 꼽았다. 당시 중학생이던 두 소녀가 경기도 양주시 인근에서 주한미군이 조종하던 미 육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일이다.
“미군들이 먼저 촛불 추모를 시작했어요. 당시 이 문제가 언론에 크게 부각되지 않은 시점이었죠. 미2사단 장병들이 저녁에 모여 두 여학생의 영정 앞에 촛불을 하나씩 놓고 추모하고 나오면서 모금함에 성금을 했어요. 그들에겐 누이 같고 딸 같은 학생들의 죽음을 추모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그러나 이후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쟁점이 되면서 촛불시위로까지 번졌다. 김 전 공보관은 “이를 계기로 주한미군은 ‘좋은 이웃 프로그램(Good Neighbor Program)’을 만들고 한국인과 관계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며 “전반적으로 미군들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한국 측과 협의하기 시작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들 사이에서 ‘56번 지방도 사고 교훈(Highway 56 Incident Lesson)’이 언급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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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분 있는 미군들 사이에 ‘레전드’ ‘갓파더’로 불려
미군들은 김 전 공보관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제 나이 예순이 됐을 때 정년퇴직을 해야 했는데, 상부에서 더 근무해 달라고 요청했다”며 “아마도 그동안의 공보 경험과 한국 언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겸손하게 답했다. 평소 친분 있는 미군들은 그를 ‘레전드’나 ‘갓파더(god father)’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은 올해 김 전 공보관의 감회는 그 누구보다 깊다. “미군이 한반도 안보의 ‘주도적’ 역할에서 ‘지원적’ 역할로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한국의 경제적·문화적 발전과 함께 미군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그는 특히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미군의 변화된 역할에 관해 설명을 덧붙였다.
“1990년대 전후로 나눠서 보시면 돼요. 이전까지 미군이 주도적 역할을 해 왔다면 1991년 10월 1일 판문점 인계철선에서 미군이 완전히 빠지고 경계 주체가 한국군으로 전환하면서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미2사단이 인계철선 역할을 한다는 건 북한군이 공격해 올 경우 미국이 자동 개입한다는 것이거든요. 주한미군의 역할이 서포팅(supporting), 즉 지원적으로 변화된 분기점이라고 봅니다. 미군이 비무장지대(DMZ)에서 완전히 철수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죠. 현재의 ‘동반자적’ 혈맹관계로 발전하는 시초가 된 것입니다.”
다양한 취재 지원을 하면서 공보관으로서의 위치가 특별히 중요하다고 느낀 부분에 대해서는 “한미 간 공보 관련 의견 조율을 할 때 한국 입장을 미국 측에 전달하고, 반대로 미국 입장을 한국 측에 전달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일치를 끌어내던 순간”이라고 꼽았다.
미군들이 생각하는 한국군의 특징도 궁금해졌다.
“미군들은 한미 연합훈련을 통해 한국군의 우수한 능력과 자질을 익히 알고 있어요. 특히 미2사단은 한국군과의 연합사단으로 한미 장병들이 함께 근무하면서 한국군을 친숙해하죠. 일반화해 말하긴 어렵지만, 대부분의 미군은 한국에 좋은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이색적인 문화, 관습, 생활에 매료된 분도 적지 않죠.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경이롭게 보면서 한국에서 복무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미군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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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하든 열정 갖고 끊임없이 배워야”
퇴임 후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론 보도에 신경 쓰지 않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한 김 전 공보관은 여전히 아침 뉴스를 챙겨 본다.
“재직 기간 취재 지원 등을 위해 판문점을 1000번 이상 방문했어요. 판문점과 관련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며칠이 걸릴 겁니다. 그동안 했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방송으로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당분간은 쉬고 나서 내년 초, 방송과 관련된 일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주한미군 공보관으로서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를, 유엔사 공보관으로서 판문점을 통해 남북관계를 지켜봤다는 자부심이 큰 그는 한미동맹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을 찾을 계획이다.
이제 그의 뒤를 이어 새로운 공보관이 자리를 채우게 된다. 현재 채용이 진행 중이지만 후배에게 하고 싶은 말로 “주한 미 공보관으로서 한미 양국에 도움이 되는 역할, 그리고 열정을 갖고 업무를 수행해 주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전했다.
더불어 한미 장병과 국방일보 독자에게도 울림 있는 조언을 남기며 인터뷰를 마쳤다.
“일에 대한 ‘열정’이 있으려면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재미’가 있으려면 임무에 ‘정통’해야 합니다. 즉 끊임없이 공부하고 부딪혀 많은 것을 배웠을 때 비로소 일을 즐길 수 있고 오랜 기간 근무하게 된다고 봐요. 어떤 위치에서, 무슨 일을 해도 끈기 있게 꾸준함을 보인다면 전문가가 되고 일에 정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조아미 기자/사진=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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