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커피사 - 한국 첫 커피하우스
1899년 독립신문 ‘다과점 개업’ 광고
“커피와 차, 코코아 판매” 기록은 처음
가장 붐비던 전차 종점 청량리에 자리
처음 커피 상시 제공한 곳은 경복궁
의료선교사 “1884년 경험” 증언도
아주 먼 옛날 카메룬에서 치자나무로 시작해 에티오피아에서 아라비카로 변신한 커피는 유목민의 건강을 지켜주는 소중한 음식이 됐다. 이후 커피는 나일강을 따라 이집트로,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반도로 전해진 뒤에는 밤을 새워 사막을 건너는 베두인들에게 잠을 쫓아주는 ‘생명의 음료’로 사랑받았다.
기원후 7세기초 이슬람이 탄생하면서 커피는 신을 직접 만나고자 했던 수피교도에게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1세기 말에 발발해 200여 년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 속에서 커피는 자취를 감췄다. 기록은커녕 구전조차 찾아볼 수 없다. 커피가 다시 회자된 것은 16세기 오스만 튀르크가 이집트와 예멘을 지배한 시대였다. 이스탄불에서 커피는 종교 음료의 한계를 벗고 마침내 대중화됐다. 커피는 더 이상 신에 다가가기 위한 ‘수행의 도구’에 머무르지 않았다. 커피를 둘러싸고 모인 사람들은 금세 친구가 됐다. 커피에는 ‘소통의 도구’라는 애칭이 붙었다.
커피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은 멀리 인도에까지 닿았다. 17세기 초 무굴제국의 수도승이었던 바바 부단이 메카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커피를 발견하고 몸에 몰래 숨겨 고국으로 가져가 카르나타카의 언덕에서 성공적으로 키워냈다. 커피에 눈독을 들이던 네덜란드의 유대상인들이 모카항을 통해 커피 묘목을 몰래 빼내 암스테르담 왕립식물원으로 가져가 키워낸 것도 이즈음이다. 그들이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데 프랑스의 도움을 얻고자 루이 14세에게 바친 진귀한 선물이 다름 아닌 커피 묘목이었다.
세상이 온통 커피를 차지하려고 난리를 칠 때, 한반도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1650년대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커피를 사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이어지고, 그 속에서 팁(tip) 문화까지 싹틀 정도였다.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에 조선 땅에는 과연 커피가 전해질 기미조차 없던 것일까?
1653년 효종 4년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은 동인도회사 직원이었다. 그때 난파한 선박은 모카항과 인도네시아 자바, 일본 나가사키를 오가는 상선이었다. 이때 하멜만 표류한 게 아니고 선원 35명이 함께 있었다. 이들은 13년간 조선에 살다가 1666년 조선을 탈출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이때 하멜 일행을 통해 조선에 커피가 전해졌는지를 밝히는 것은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17~18세기 세계적으로 커피를 전파하는 데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의 역할도 컸다. 동남아시아와 남미 등 커피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에서 선교사들은 가난한 현지인의 자립을 위해 커피나무를 나눠주며 재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밤을 새워 선교하는 프랑스 신부들에게도 커피는 역경을 이겨내기 위한 에너지를 북돋아주는 소중한 음료였다. 조선 선교를 위한 예수회의 본부는 중국 북경에 설치됐다. 이에 따라 커피를 접한 최초의 조선인으로 1780년대 정조 시절 활동한 이승훈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승훈은 북경으로 건너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영세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그는 40여 일 동안 프랑스 선교사들과 숙식을 하면서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커피를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승훈은 1785년 최초의 조선 교회를 세우고 다산 정약용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이런 인연 끝에 두 사람은 처남 매부 사이가 됐는데, 당시 차를 좋아하던 다산이 커피를 마셨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볼 만하다. 수원성을 축성하는 데에 사용된 거중기는 다산이 서양의 기술과 도르래 원리를 응용해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양 학문이 다산에게 전해지는 자리에 커피가 놓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회의 손이 닿는 곳에는 커피가 전해졌는데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주교는 정조가 관대했던 덕분에 18세기 말 전국적으로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순조가 즉위하며 상황이 급변했다.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바람에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 이승훈, 정약용이 유배를 당하고 청나라에서 온 주문모 신부는 고문 끝에 순교했다. 순교자가 나온 곳에 예수회는 더욱 집중적으로 선교사를 파견했다. 1839년 헌종 5년에는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이 발생해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프랑스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또 순교했다.
사실 이즈음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커피를 가져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1855년 철종 6년에 밀입국한 시메옹 베르뇌 주교에 의해 마침내 한반도에 커피가 들어오게 됐다. 베르뇌 주교가 예수회 본부와 주고받은 편지에는 1861년 4월 7일에 홍콩에서 인편을 통해 조선땅의 베르뇌 주교에게 커피 원두가 전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커피가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철종 때이며, 조선 땅에서 커피를 마신 내국인은 베르뇌 주교와 함께 선교활동을 벌인 천주교 신자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철종 때 커피가 전해졌다고 해도,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는 분위기에서 커피하우스나 카페 문화가 싹트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커피를 음료로 판매한 조선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언제 어디에서 탄생한 것일까?
기록만으로 따져볼 때 조선 땅에서 커피를 음료로 상시 제공한 최초의 공간은 경복궁이다.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기록된 호러스 알렌은 1884년 경복궁에서 커피가 제공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고종의 어의가 됐고, 정2품 벼슬도 받았다. 알렌은 3년간 경복궁에서 일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1908년 펴낸 『한국의 풍물(Things Korean)』에 “궁중에서 대기하는 동안 시중들은 사양하는데도 불구하고 잎담배와 샴페인, 사탕, 과자를 끝까지 후하게 권했다. 후에 그들은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그 품목에 홍차와 커피를 추가했다”고 적었다. 고종이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다고 알려진 1896년 아관파천보다 12년 앞서 경복궁에서 외교관을 대접하는 공식 음료로 커피를 제공했던 것이다.
일반인이 상업적으로 커피를 판매한 커피하우스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99년 대한제국 때다. 독립신문 1899년 8월 31일 자엔 ‘윤용주가 홍릉 전차 정거장 앞에서 다과점(Refreshments)을 개업하고 커피와 차, 코코아를 판매한다’는 광고가 실려 있다. 문구만으론 시설과 규모를 알 수 없지만 ‘윤용주의 다과점’은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한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다.
1899년은 제물포와 서대문을 연결하는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번성했던 항구의 서구 문화가 빠르게 서울로 옮겨진 해로 기록된다. 앞서 1888년 4월 제물포엔 대불호텔이 있었다. 이 호텔은 미국 군함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일본인이 세운 것이다. 이와 함께 1890년 이전까지 제물포엔 중국인 이태가 세운 스튜어드 호텔과 헝가리 사람이 소유한 호텔 드 꼬레 등 3개의 호텔이 있었는데, 유럽인이 자주 출입한 만큼 커피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그러나 이들 호텔에서 커피를 팔았다는 물증은 아직 없다.
조선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광화문이나 종로와 같은 번화가가 아니라 동대문 밖 전차 종점이었던 청량리 홍릉이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1899년 5월 20일 서울에서 전차가 처음 운행되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린 곳이 홍릉이었다. 을미사변으로 목숨을 잃은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은 당시 우리 겨레의 한이 서린 곳이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더욱이 ‘철도깨비’ ‘쇠당나귀’라고 불리며 호기심을 잔뜩 부풀렸던 전차까지 어우러져 홍릉 전차장은 ‘1899년 조선 땅에서 가장 핫한 곳’이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커피하우스가 탄생한 것은 앞선 서구의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에게도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대한제국, 바로 ‘황제의 시대’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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