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그냥 할까요

입력 2023. 09. 26   13:51
업데이트 2023. 09. 2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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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안 소설가
최유안 소설가



강연을 가면 스트레스 관리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상황에 따라 답은 조금씩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문제에는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이다. 스트레스의 표현이 슬럼프냐 우울이냐 슬픔이냐에 따라 방법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얼마 전 강연에 앞서 질문지를 받았는데, 그중에 삶이 막막하다는 문장이 있었다. 나이도 이름도 밝히지 않은 질문자의 문장이었지만 내 눈길은 그곳에 한참 멈춰 섰다. 문장에는 힘이 없었다. 안타까웠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고, 살면서 자주 그것을 지나쳐 왔으며, 지금도 당연히 가끔 지친다. 그 질문에 지금 당장 잘되는 것이 없어 보여도 하루를 충실히 보내며 묵묵히 할 일을 하자는 답을 내놓고 왔다.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언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되물었다. 생활 속에서 나는 비교적 계획을 짜고,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 즉흥적으로 움직이면 시간을 조율하기가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리 기록해 두지 않으면 할 일을 잊어버리는 탓도 있다. 그러다 얼마 전 생각지 못하게 파도처럼 일이 몰려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상황에서도 묵묵히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기차를 타고 가다 오송역을 지나는데, 문득 10년 정도 KTX를 타고 세종과 인천 검암을 오가며 출근하던 지인이 생각나 안부 문자를 보냈다. 10년 정도를 오갔으니 체력도 체력이고 아마 힘이 들어 지금쯤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두 도시를 오가며 출퇴근한다고 했다. 집안 사정 탓에 한곳에 정착하기가 여전히 쉽지 않다는 답이었다. 문득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그 거리를 매일 출퇴근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답했다. “그냥 하는 거지. 별생각 없이.” 그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묵묵히 할 일을 하긴 했지만, 늘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세워 둔 일정을 되도록 잘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스스로 만들어 둔 기준 탓에 스트레스도 받았다. 그러다 보니 다 해내지 못하면 실패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뭐, 삶이 그런가. 하고 싶지만 못 하기도 하고, 할 수 없어 보이는데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나.

매일 아침 요가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오늘 아침에는 몸이 좋지 않아 매트 위에 서서 조금 망설였다. 그러다가 문득 10년 넘게 인천 검암과 세종을 오가며 출퇴근 중인 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그냥 하자는 생각도 뒤따랐다. 몸이 좋지 않으면 좋지 않은 대로 조금씩, 그렇게 하자는 생각도 뒤따랐다. 그러자 잘하든 못하든 요가를 하는 오늘의 시간도 지나갔다.

요가를 마친 뒤 나는 선뜻 ‘그냥’이라는 말에 마음을 내어 줬다. 그 단어는 내가 썼던 ‘묵묵히’보다 가벼웠고, 그러자 그 시간의 무게를 좀 덜어 주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그냥’ 앞에 있는 일을 해 가다 보면, 어쨌든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 질문지를 받아 들게 된다면, 이 말을 덧붙여 주고 싶다. 묵묵히만 할 것이 아니라, 그냥 하자고. 내 앞에 주어진 일을 그냥 하고 있으면 그것이 내 루틴이 되고, 내 삶이 되고, 모르는 새 내 앞에 어떤 형태로든 돌아와 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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