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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을 말하다] (17)김종기 미공군전공기념사업협회 대표

입력 2023. 09. 22   17:13
업데이트 2023. 09. 2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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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좋은 일은 계속하라’ 아버지 가르침 이어갑니다

우리나라 지키다 희생한 미 전몰장병 추도
일제 말 미 공군 11명 시신 수습한 아버지…사재 털어 추도식
교과서 ‘초등 도의’에 선행 실리고…미 육군 공로훈장 받기도

‘한미동맹 정신’ 그 자체인 아버지 존경
ROTC 임관해 6년간 육군 복무…아버지 이어 추도사업 지속
“젊은 세대에 역사적 사실 알리고파…정부 무관심 안타까워”

김종기 미공군전공기념사업협회 대표가 국방일보와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종기 미공군전공기념사업협회 대표가 국방일보와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45년 8월 7일, 경남 남해 망운산에 항공기 1대가 추락했다.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기지를 폭격하려다 일본군이 쏜 대공포를 맞은 미군 폭격기였다. 이 사고로 폭격기에 탑승한 조종사와 승무원 11명이 모두 전사했다. 현장을 목격한 김덕형 씨는 시신을 전부 수습해 안장했고, 이 일로 일본군의 미움을 사 옥고를 치렀다. 광복 뒤 그는 추락현장에 전공기념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추도사업을 이어갔다. 추도를 위한 사단법인 미공군전공기념사업협회도 설립했다. 78년이 지난 현재 추도사업은 김씨의 차남인 김종기 미공군전공기념사업협회 대표가 잇고 있다. 부자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미 전몰장병을 수십년 째 추도하는 이유를 들어봤다. 글=이원준/사진=김병문 기자


‘두 번이나 받은 은혜 갚아야’

“아버지께서는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말씀을 항상 하셨어요.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이 일본군을 물리친 덕분에 독립을 맞았고, 6·25전쟁에서도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대한민국을 구했으니 두 번이나 은혜를 입은 것이라고 하셨죠. 아버지께서 눈감으실 때까지 사재를 털어 가며 11명의 전몰장병을 추도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지난 20일 서울 수유동에서 만난 김 대표는 2010년 작고한 부친 김덕형 씨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김 대표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미공군전공기념사업협회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매년 11월 첫째 주 금요일 미 전몰장병을 위로하기 위한 추도식을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행사가 열린 지도 올해로 78년째다.

78년 전 그날 김덕형 씨는 야심한 밤 망운산에서 난 큰 폭발음을 들었다. 주민들과 함께 오른 망운산에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폭격기는 산 중턱에 곤두박질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잔해 속에 11구의 시신이 흩어져 있었다. 먼저 왔던 일본군은 잔해 속에서 귀중품만 챙긴 채 현장을 떠났다. 하지만 김씨는 시신이라도 수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버지께선 일본군에 징용돼 미얀마에서 비행기 사고로 숨진 작은형님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누군가 형님 시신을 수습했을 거란 기대감에, 자신 역시 미군 시신을 매장해야겠다고 결심하신 거죠. 인류애 또는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인부 일당이 20원이었는데, 현장이 870m 고지인 탓에 50원을 주고 사람을 써 함께 현장을 정리하셨어요. 잔해 속에 있던 낙하산 천을 다듬어 시신을 수습한 뒤 매장하셨다고 합니다.” 

김씨는 이 일로 일본 관청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적국 전몰장병을 수습한 선행이 ‘반(反)일본적 행태’라는 이유였다. 다행히 그의 감옥살이는 열흘을 넘지 못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갑작스럽게 조국 광복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김 대표의 부친 김덕형 씨 사연이 실린 ‘초등 도의’ 교과서.
김 대표의 부친 김덕형 씨 사연이 실린 ‘초등 도의’ 교과서.



“아버지께선 감옥에서 ‘거의 죽었구나’라고 생각하셨다고 해요. 그러다 기적처럼 살아 돌아올 수 있었죠. 조국이 광복을 맞은 것도,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미국 덕분이라는 고마움을 느낀 아버지는 그 뒤로도 매일같이 추락현장을 찾으셨습니다. 1946년 전몰장병 11명을 위한 추도식을 시작했고, 미군에도 이러한 사실을 알려 시신이 모두 본국으로 송환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김씨의 노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1년간 꾸준히 저축한 자금으로 1956년 11월 망운산에 ‘미 공군 전공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정부나 지자체 도움 없이 오롯이 혼자만의 노력으로 일궈 낸 결과물이었다. 기념비 비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보낸 친필 휘호로 새겼다.

“11명의 전몰장병을 추도하는 의미를 담아 기념비 높이도 11피트(약 3.3m)를 맞췄습니다. 아버지께선 기념비를 제작하기 위해 술과 담배까지 끊고 자금을 마련하셨습니다. 번듯한 기념비가 세워질 때까지 11년이 걸렸죠. 제막식에는 당시 미 대통령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특사도 참석했습니다.”

생면부지 미 전몰장병을 향한 김씨의 선행은 1958년 문교부(현 교육부)가 만든 교과서 ‘초등 도의’에 실리기도 했다. 교과서는 김씨가 남해에 미군 전몰장병을 위한 전공기념비를 만든 사연을 자세히 소개하며 ‘험한 산중에 한 사람의 힘으로 국제 친선을 위해 애쓴 정성이 크다’고 기술했다.

1986년에는 미 육군도 김씨의 공로를 높이 사 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아버지가 하신 일은 한미동맹의 초석

김 대표는 평생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온 아버지 유지를 이어 매해 11월 추도식을 열고 있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올해 행사는 예년보다 큰 규모로 준비하고 있다.

김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망운산에 올라 추도식을 올린 기억을 갖고 있다. 행사에 참가한 미군들과 악수하며 자연스럽게 군인과 친숙해졌다. 성인이 돼서는 학군사관후보생(ROTC) 14기로 임관해 육군에서 복무했다. 

전역 후 회사원으로 일한 김 대표는 아버지가 별세한 2010년부터 미공군전공기념사업협회 대표를 맡고 있다.

부친 김덕형 씨가 1986년 미 육군으로부터 받은 공로훈장.
부친 김덕형 씨가 1986년 미 육군으로부터 받은 공로훈장.



“사실 어렸을 땐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돈을 털어 가며 추도식을 하고 기념관을 세우셨기 때문이죠. 추도사업에 쓴 돈을 모아 땅만 샀어도 엄청난 부자가 됐을 것입니다(웃음). 물질적으로 받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저는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아버지께서 실천한 정신은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많습니다. 특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가 꼭 배웠으면 합니다.”

1954년생인 김 대표는 한미동맹이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전후세대로서 한미동맹의 혜택을 70년간 누려 왔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한미동맹의 뿌리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제가 태어난 1954년 발효됐습니다. 이런 점도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한 명의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한미동맹 정신 그 자체인 아버지를 만나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추도사업을 통해 더 많은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자 합니다.”

김 대표는 ‘옳고 좋은 일은 계속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추도사업을 이어왔지만, 최근 많은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해가 갈수록 아버지의 선행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추도사업을 둘러싼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아쉽다고 김 대표는 힘줘 말했다.

“미 육군 훈장까지 받았지만, 우리 정부로부턴 아무것도 받은 게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13년이 흘렀는데 이제라도 정부, 특히 국가보훈부가 관심을 갖고 합당한 대우를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들로서 이 부분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아버지가 하신 일은 한미동맹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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