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인간

악명 날린 나치 특수부대 지휘관의 자기변명

입력 2023. 09. 20   16:29
업데이트 2023. 09. 2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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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의 회고록 -『슈코르체니, 나의 특수작전 임무』

미션 임파서블 무솔리니 구출 작전 주역
해발 2000m 고산 글라이더 이용 침투
헝가리 친독 괴뢰정부 수립 큰 역할도

종전 후 수감 중 탈옥 스페인서 새 삶
죽을 때까지 전쟁 참여 사실 후회 안해
장례식 땐 전직 친위대 장교들 총집결

뉘른베르크 법정의 슈코르체니(왼쪽 둘째). 사진=위키백과
뉘른베르크 법정의 슈코르체니(왼쪽 둘째). 사진=위키백과



1943년 7월 25일, 이탈리아 국왕과 의회는 무솔리니를 실각시켰다. 이탈리아의 새 총리 바돌리오는 9월 3일, 연합군과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5일 후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는 이탈리아의 항복을 공식 선언했다.

히틀러는 다급해졌다. 이탈리아가 연합군 수중에 들어가면 발칸 반도와 독일 본토가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구출할 것을 명령했다. 독일 정보부대는 북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 중턱의 ‘그란 사소 호텔’에 이탈리아 무장경찰 1개 중대가 배치된 것을 탐지했다. 무솔리니는 그곳에 감금된 것이 틀림없었다.

위치를 알아냈으나 구출 부대 투입은 쉽지 않았다. 그란 사소 호텔은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곳에 있었다. 육로로 접근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이탈리아 국가헌병대와 충돌을 감수해야 했다.

수송기는 고지대에 착륙할 수가 없었고, 고지 사이의 강풍 탓에 낙하산 강하도 실패 확률이 높았다. 구출 부대 지휘관 오토 슈코르체니(1908~1975)는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슈코르체니는 글라이더를 이용해 정예 병력을 그란 사소 호텔에 직접 하강시키고, FA223 헬기로 무솔리니를 구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대담한 작전은 시작부터 꼬였다. 글라이더가 사고로 늦게 도착해 작전 시간이 오후로 변경되었고, FA223 헬기도 파손됐다. 그러나 슈코르체니는 FA223을 소형 정찰기 Fi 156으로 대체한 다음, 병력을 신속히 글라이더에 탑승시켜 작전을 강행했다. 12대의 글라이더 중 8대가 무사히 그란 사소에 착륙했다.

슈코르체니가 이끄는 무장친위대와 공수부대원들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4분 만에 수비 병력을 제압했다. 무솔리니를 구출한 슈코르체니는 Fi 156 조종사 하인리히 게르라하 대위에게 신속히 이륙하라고 명령했다. 게르라하는 활주로가 짧은데다 세 사람이 타기에는 무리라고 버텼으나 슈코르체니는 권총을 들이대고 이륙을 재촉했다. 중량 초과에 활주로가 내리막길인 상황에서도 Fi 156은 가까스로 이륙에 성공했다. 3일 후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독일 라슈텐부르크 비행장에서 재회했다.

이 작전은 오늘날까지 가장 완벽한 구출 작전의 대명사로 남았다.

1년 후 슈코르체니는 독일과의 동맹에서 이탈하려는 헝가리 정부를 압박해 친(親)독일 괴뢰정부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44년 12월에는 독일군 최후의 반격 작전인 ‘아르덴 공세’에도 참가했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대원들로 구성된 슈코르체니의 특수부대원들은 미군 후방에 침투해 도로표지판을 돌리고, 기갑부대 진입로에 지뢰밭 표지를 하는 등 미군의 이동을 방해했다. 미군들은 슈코르체니 특수부대원들을 수색하면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숱한 격전을 거친 슈코르체니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았다. 연합군 정보부는 그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로 명명했다.

종전 후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연합군 검사들은 슈코르체니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검사들은 1944년 히틀러 암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 베를린의 평정을 맡은 점, 아르덴 공세 때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점을 주요 혐의로 지목했다. 그러나 연합군 특수부대 역시 적의 군복을 입고 작전을 벌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스파이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민간인이나 포로를 학살했다는 혐의도 밝혀지지 않았다.

주요 혐의는 벗었지만, 슈코르체니는 다하우 감옥에 계속 수감됐다. 하지만 그는 1948년 7월 탈옥에 성공,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그의 안전을 보장했다. 슈코르체니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이력을 살려 스페인에서 기술자로 제2의 삶을 살았다. 1952년 서독 정부는 그가 ‘비(非)나치화’ 됐다고 선언했다.

슈코르체니가 공식적으로 여행의 자유를 얻자 그가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에 나치 출신 과학자들의 정보를 넘겨줬고,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 대통령의 정치고문을 맡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슈코르체니는 스페인에서 살아남은 친위대원들을 규합해 모임을 갖는 등 언론에 자주 포착됐다. 스페인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나치 잔당의 도피처’라는 비난을 받았다.

슈코르체니 회고록 표지.
슈코르체니 회고록 표지.



훗날 슈코르체니는 회고록을 집필하여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변명했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빈 공과대학 재학 시절 조국 오스트리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심에서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한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정치·경제적 혼란이 지속됐다. 1931년 나치에 가입한 슈코르체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자 독일 공군에 입대했다. 조종사로 활동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던 그는 무장 친위대로 옮겨졌다.

동부전선에 참전한 슈코르체니는 1942년 심한 이질에 걸려 후송됐다. 치료를 마친 그는 베를린 주둔 무장 친위대 특수부대에 배치돼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전설적인 특수부대원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그는 군인보다는 차라리 정치가나 외교관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슈코르체니는 유럽의 정세와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회고록에서 슈코르체니는 히틀러의 소련 침공이 실패한 이유와 지중해 몰타 섬의 중요성을 합리적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전쟁 초기 프랑스를 점령한 다음 스페인을 가로질러 영국의 해군기지가 있는 지브롤터를 장악했다면 전쟁을 오래 끌지 않고 영국과 협상이 가능했으리라고 분석했다. 영국과 미국이 독일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소련이 동유럽을 장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는 슈코르체니의 생각은 전후에 전개될 냉전을 예측한 처칠 영국 총리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연합군이 ‘정의로운 승리’를 자축하는 사이 소련이 중부 유럽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종전 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벌어진 사실을 거론하면서 전쟁 중 여러 차례 시도한 협상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아쉬워했다.

전쟁 초기 슈코르체니의 견해가 독일의 결정에 반영되었다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그는 괴벨스의 연설을 듣고 나치즘에 빠진 오스트리아의 불행한 청년에 불과했다. 슈코르체니의 회고록은 아쉽게도 참회의 기록이 아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전쟁에 가담한 사실을 후회하지 않았다. 1975년, 슈코르체니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 모인 전직 친위대 장교들은 나치식 경례를 하며 그를 애도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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