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영화

"사방이 포위됐다… 아군 위로 폭격 요청한다"

입력 2023. 09. 13   15:49
업데이트 2023. 09. 13   15:57
0 댓글

전쟁과 영화 - 댄저 클로즈 : 롱탄 대전투(2019)
감독: 크리브 스텐더스 출연진: 트래비스 핌멜, 루크 브레이시, 대니얼 웨버

“역사상 모든 전투는 각기 다를지라도 ‘전투’라는 말로 분류한다면 틀림없이 어떤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즉 자기 보존의 본능을 통제하려고 애를 쓰는 행위, 명예심,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떤 목적의 성취다. 따라서 전투에 관한 연구는 항상 공포와 용기에 관한 연구이며, 때론 신념과 비전에 관한 연구이기도 하다.” (『전투의 심리학』 중, 데이브 그로스먼·로런 W. 크리스텐슨 지음, 플래닛 펴냄)

영화 ‘댄저 클로즈: 롱탄 대전투’는 실제 전투에 쓰였던 병력 수송 장갑차(APC)와 기관총을 비롯해 105밀리 곡사포를 촬영에 동원해 처참한 전쟁의 현장을 현실감 있게 담았다. 영화 ‘댄저 클로즈: 롱탄 대전투’스틸컷.
영화 ‘댄저 클로즈: 롱탄 대전투’는 실제 전투에 쓰였던 병력 수송 장갑차(APC)와 기관총을 비롯해 105밀리 곡사포를 촬영에 동원해 처참한 전쟁의 현장을 현실감 있게 담았다. 영화 ‘댄저 클로즈: 롱탄 대전투’스틸컷.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진 미국 

베트남 전쟁은 1명의 주인공과 5명의 조연이 이어 등장하는 5막짜리 희비극과 같았다. 누가 뭐래도 주인공은 호찌민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뉴욕타임스 발행인에게 사이공 특파원 교체를 요구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데이비드 할버스탐 기자는 호찌민을 이렇게 말했다. “한쪽은 간디의 모습을, 또 한쪽은 레닌의 모습을 한 완전한 베트남인”

1969년 9월 2일, 그가 죽자 뉴욕타임스에는 이런 부고 기사가 실렸다. “호찌민은 엄청난 끈기와 인내로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목표를 추구했으며,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성공적으로 결합한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으로 이어지는 5명의 조연이 베트남의 현실을 잘못 인식하는 바람에 돌이킬 수도 있었던 비극을, 숙명적인 비극으로 돌려놓았다. 존슨이 등장하자 비극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존슨은 북베트남에 전략적 폭격을 개시했다. 폭격을 가하면 하노이도 정신을 차리게 되리라고 간단하게 생각했다. 힘으로 안 될 때는 교묘한 조작을 추가했다. 그러나 폭격도, 돈도 호찌민을 유혹하지 못했다. 타협에 응하지 않는 적을 이해할 수 없었던 존슨은 그가 가진 유일한 강압 수단인 군사력에 의존했다.


베트남 전쟁 참전한 호주군의 '롱탄전투'
오늘날 포위 상황 전투 교본으로 평가
헬기·장갑차 동원 우수한 무기체계
뛰어난 사격 유도술·소부대 전투기술
진내사격까지 요청…수적 열세 뒤집고 승리


1964년 존슨은 25개국에 베트남 파병을 요청하는 ‘모어 플래그(More Flag)’ 캠페인을 벌였다. 1965년 대대적인 전투부대의 투입을 승인했다. 결국 그는 이길 수는 없지만, 그냥 패배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전쟁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의 전쟁 수행 능력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굴복하기는커녕 전쟁 의지만 부추겼다. 특히 베트콩(Viet Cong)이라 불린 남부 반란군은 골칫거리였다. 이들은 참호에 몸을 숨긴 숙달된 게릴라 전사였으며, 잘 무장된 북베트남군의 지원을 받았다. 게다가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는 대중의 지지를 잃었고 미국의 엄청난 물량 공세에도 전쟁은 교착 상태를 이어갔다. 미국은 점점 수렁에 빠져 들어갔다.


2500명 적군과 맞선 108명 영웅 

영화 ‘댄저 클로즈 : 롱탄 대전투’는 존슨 대통령이 전개한 ‘모어 플래그(More Flag)’ 캠페인에 부응해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단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이다.

호주는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부터 ‘자타공인’ 동남아시아의 군사 안보적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마침 동남아시아에서 심각한 군사적 위협에 직면한 곳이 베트남이었고, 이곳은 당시 불어닥친 도미노 이론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6·25 전쟁에도 참전한 호주는 도미노 이론을 철석같이 믿던 반공 국가였다. 호주는 ‘특정 국가가 공산화되면 인근 국가들도 연쇄적으로 공산화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6년 8월. 남베트남 누이닷으로 파병된 호주군 제1 특임대 예하 D중대는 한밤중에 적의 포격을 받고, 반격을 가하기 위해 출격한다.

이때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연합군이 몰려오고, 해리 스미스 소령이 지휘하는 D중대는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예상했던 적의 병력은 생각보다 많았다. 부상자는 늘어나고, 탄약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스미스 소령은 진내사격을 결심한다. 진내사격은 교전 중인 보병의 최후수단으로 적의 예봉을 쳐내기 위해 ‘내 머리 위로 폭격해달라’는 요청을 상급 부대에 하는 것.

‘롱탄전투(The Battle of Long Tan)’는 호주 장병의 군인정신과 전투력이 잘 드러난 전투로 오늘날 ‘포위 상황 전투의 교본’으로 불리고 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전사자 245명, 부상자 350명의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호주군은 전사자 18명, 부상자 24명이었다. 연구자들은 승리의 요인을 세 가지로 꼽는다. 우수한 무기체계(항공기·헬리콥터·장갑차), 뛰어난 사격 유도술, 숙련된 소부대 전투기술이 그것이다.



▲ 호주·뉴질랜드의 현충일 ‘안작 데이’를 아시나요?

한국에 현충일이 있다면 미국엔 5월 마지막 월요일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가 있다. 남북전쟁 후 북군 장군 로선이 1868년 5월 30일 전사한 병사들의 무덤에 꽃을 장식하도록 포고령을 내린 것에 유래한다. 캐나다는 11월 11일 가슴에 양귀비꽃을 달고 다니는 ‘리멤버런스 데이(Remembrance Day)’가 있다.

4월 25일은 호주와 뉴질랜드의 안작 데이(ANZAC Day)다. 안작은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단(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의 약자다. 안작 데이의 시작은 1차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역사상 최초로 양국 연합군인 안작을 편성하고, 1915년 4월 25일 튀르키예(당시 오스만 제국)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한다.

안작군은 상륙에 성공, 8개월 동안 효과적으로 방어한다. 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튀르키예와 독일군의 협공에 못 이겨 철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8000명이 전사하고 1만8000명이 부상하는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이 전투는 호주와 뉴질랜드 국민에게 엄청난 쇼크였다. 이에 따라 1916년 4월 25일부터 매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행사를 연다. 현재는 2차 대전과 한국, 베트남 전쟁을 포함해 최근 걸프전과 보스니아 내전에 이르기까지 참전했던 모든 군인을 추모하는 날로 바뀌었다.

새벽에는 당시 병사들이 먹었던 안작 비스킷을 먹는다. 이날은 ‘투업(two-up)’이라는 도박 게임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1차 대전 당시 공포를 잊기 위한 병사들의 놀이를 재현한 것. 두 개의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를 두고 내기를 하는 게임이다.


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