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52) 6·25전쟁 격전지 동부전선 지켜낸 한종현 옹

입력 2023. 09. 11   16:29
업데이트 2023. 10. 3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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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가족부터 죽는다’ 소문에 
허겁지겁 오른 피란길
전투기 폭격에 죽은 엄마, 우는 아이
전쟁 참상 보며 학도병 자원입대

의무대서 심부름하며
어깨너머로 익힌 지혈법·주사법으로
다리 절단된 여성 응급처지도

기습적 추위와 쏟아지는 포탄 맞서
낮에는 목숨 걸고 싸우고
밤이면 막사 안에서 전우 껴안고 눈물
그곳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도 얻어

6·25전쟁 기념 시설 만들어
후손들 역사관 바로 세우고파

한종현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 자문위원이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참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종현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 자문위원이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참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쟁은 참혹했다. ‘38선’에서 4㎞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던 소년에겐 더욱 그랬다. 두 번이나 피란길에 오른 끝에 어린 나이에 총을 들고 나선 한종현 옹은 그 누구보다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겪은 인물이다. 학도병이었던 한옹은 짧은 기간에 대관령·오대산·향로봉전투를 비롯해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한 ‘베테랑 전사’가 됐다. 여전히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 자문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옹이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쉰두 번째 주인공이다. 글=조수연/사진=김병문 기자


두 번의 피란길… 전투기 폭격도 

열여섯 살 소년이었던 한옹은 여전히 1950년 6월 25일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의 고향인 강원도 강릉시 명주군 현남면은 38선과 고작 4㎞ 떨어진 마을.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요일이었다.

삼형제 중 막내였던 한옹은 가족들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마치 자연재해처럼 갑자기 들이닥쳤다.

“큰형은 38선상인 현북면 잔교리에서 경비를 서는 금강부대 중대장이었고, 둘째 형도 군인이었어요. 그날은 주말을 맞아 외출 나온 큰형이 집에서 쉬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형이 급히 부대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군인·경찰 가족부터 다 죽는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한옹 가족은 북한군이 쏘아대는 대포 소리를 들으면서 허겁지겁 피란길에 올랐다. 두 달 넘게 각지를 전전하며 악전고투를 벌인 한옹 가족은 같은 해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강릉이 안정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듬해 1·4후퇴의 여파로 두 번째 피란 봇짐을 싸야 했다.

“이번엔 삼척으로 가게 됐어요. 피란길에 연곡천을 지나는데 전투기가 폭격을 하더라고. 다리 밑에 숨었다가 폭격이 끝난 다음 나와보니까 아기를 업은 엄마가 쓰러져 있고 아이는 울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죽은 걸 눈앞에서 보니까 ‘이게 전쟁이구나’ 느끼게 됐죠.”

두 번째 피란길에서 전쟁의 참상을 마주한 한옹은 분노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삼척 시내에서 마주친 군인들을 따라 자원입대하며 학도병이 됐다. ‘조국을 지키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트럭에 몸을 실은 그는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뒤 수도사단 1연대 2대대에 배속된 학도병으로 대관령전투에 투입됐다.

한옹이 간직하고 있는 군 생활 당시 사진.
한옹이 간직하고 있는 군 생활 당시 사진.



눈앞에 죽음이… 참혹했던 전장 

“어느날 군수품을 나르고 있는데, 의무대장이 나를 불러서 ‘의무대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곳에서 약과 붕대를 갖다주는 심부름을 하면서 응급처치법을 배웠습니다.”

어깨너머로 지혈법·주사법·붕대법 등을 배운 한옹은 금세 의무병 티를 낼 수 있게 됐다. 그는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다친 민간인을 처치해준 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한번은 폭탄을 맞고 다리가 절단된 여성 민간인을 응급처치 했는데,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해요. 그만큼 전쟁은 비참했습니다.”

한옹의 부대는 12월 중순 동해안에서 적 거점인 오대산 일대를 소탕했다. 양양을 목표로 북진하던 부대는 해안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북한군에게 사살되거나 물에 잠겨 죽은 처참한 광경을 마주친 것.

“북한군이 지식인, 기술자는 물론 민간인을 마구 납치해갔단 말이에요. 시신이 바닷가에 둥둥 떠 있고, 모래사장에도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대충 봐도 100명이 넘는 것 같았어요.”

그해 겨울은 기습적인 추위가 찾아왔다. 하지만 한옹은 한계령 골짜기를 넘어야 했다.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힘차게 나아갔지만, 그 과정에서 전우들의 죽음을 수없이 마주해야만 했다. 그는 전사한 아군의 시신이 산 위에서 굴러 내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밤이면 판초 우의 두 벌을 나무로 이어 만든 막사 안에서 전우들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낮에는 목숨 걸고 싸우지만, 밤에는 숨죽이고 있어야 했습니다.한번은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확인해보니 북한군 시신이 있었어요. 난 나무토막인 줄 알았지…. 그래도 우리는 좋은 장비 하나 없이도 적과 싸워 이길 만큼 용감하고 기합이 바짝 들어 있었습니다.”

한옹의 부대는 길어지는 전투 탓에 전사자가 많아 다른 사단·연대와 교대하는 일이 잦았다. 한옹의 부대는 돌고 돌아 전남 구례·곡성에 있는 지리산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에도 투입됐다. 겨울 지리산은 오직 흰 눈만 가득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새하얀 설산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지만 한옹의 눈에는 그저 전쟁의 포화가 쓸고 간 폐허로 느껴졌다고 한다.

“정말 추운 겨울이었어요. 우리는 옷을 몇 겹씩 껴입었는데도 다 긁히고 찢어졌거든요. 아마 공비들은 겨울 산에서 살아남기가 더 어려웠을 겁니다.”

부대는 강원도 금성에 다다라 미군 부대와 또 한 번 임무 교대를 했다. 땅속에서는 가끔 미군이 쓰던 통조림·커피·담배·껌 등이 나오기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금싸라기’ 땅이었다. 하지만 밤만 되면 사방이 포탄으로 뒤덮였다. 한옹도 그곳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얻었다.

“어느날 밤은 (포탄이) 유난히 더 많이 떨어지더라고. 바윗돌 밑에 있는 취사장으로 도망치다가 마지막 계단에서 ‘쾅’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었어요. 눈 떠 보니 다리를 크게 다쳤더라고요. 그래도 살았으니 난 운이 좋은 겁니다.”

결국 수많은 전투를 치른 그에게 귀가 명령이 내려졌다. 정전협정에 따라 학도병을 일괄적으로 집에 돌려보낸 것. 하지만 한옹은 나이가 차자 다시 정식으로 국군에 입대해 군복을 입었다. 그는 논산훈련소·김해 공병학교 교육을 마치고 1106야전공병단 본부에서 군 생활을 했다.

참전 당시 적의 포탄에 맞아 다리에 생긴 흉터.
참전 당시 적의 포탄에 맞아 다리에 생긴 흉터.



‘6·25전쟁 기념관’ 건립되기를 

한옹은 인터뷰 내내 “우리는 애국자 집안”이라고 강조했다. 한옹이 어린 나이에 망설임 없이 참전할 수 있었던 것도 형들의 영향이 컸다. 첫째 형은 살아 돌아왔지만 전사한 둘째 형은 아직 유해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 삼 형제는 평생 대한민국에 충성했습니다. 모두 전쟁 한복판에서 싸웠으니까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종종 둘째 형 유해를 찾고 있다고 연락이 옵니다. 지금도 형이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한옹은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 자문위원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매년 70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6·25 바로 알리기 교육’에도 적극 참여하는 중이다. 후손들의 역사관을 바로 세우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그의 간절한 소망은 6·25전쟁을 기념하는 시설이 건립되는 것이다.

“물론 전쟁기념관이 있지만 6·25전쟁만을 기억하기 위한 독립 시설은 아직 없잖아요. 목숨 걸고 싸운 참전용사는 물론 후손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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