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인간

처참히 파괴된 폐허 속에서도 인간애는 피어났다

입력 2023. 09. 06   16:13
업데이트 2023. 09. 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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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지옥의 마지막 관문, 베를린 공방전 - 앤터니 비버 『베를린 함락 1945』

미 핵무기 프로젝트에 다급해진 스탈린
독일 연구소 뺏으려 베를린 점령 재촉
지휘부 의도보다 복수심 앞선 소련군
‘나치의 심장’서 무자비한 약탈·파괴

광기의 기록 한편에 쓰여진 휴머니즘
친절한 병사·서로 돌보는 사람들 감동

앤터니 비버의 저서 『베를린 함락 1945』(글항아리, 2023) 표지.
앤터니 비버의 저서 『베를린 함락 1945』(글항아리, 2023) 표지.



“1943년 2월 한 소련군 장교가 스탈린그라드의 폐허에서 독일군 포로들을 조롱하며 이런 말을 했다. ‘베를린이 곧 저렇게 될 거야!’ 그리고 몇 년 후 베를린은 정확히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55쪽)

1945년 1월, 소련의 ‘붉은 군대’는 마침내 독일 본토에 진입했다. 서부전선의 아르덴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독일군의 전략 물자는 바닥을 드러냈다. 소련군은 베를린으로부터 65㎞ 떨어진 오데르강에 교두보를 구축했다. 처칠 영국 총리와 미 제3군 패튼 중장은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와 죽음을 앞두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자 했다. 연합군과 소련군이 서로를 불신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나치 고위 관리들은 협상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소련군은 250만 명의 병력, 7500대의 항공기, 6250대의 전차, 4만1600문의 대포를 동원해 최후의 전투를 준비했다.

영국 역사가 앤터니 비버의 『베를린 함락 1945』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유럽 최후의 전투, 베를린 공방전을 다룬 저서다. 이 책은 소련, 독일, 스웨덴,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의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1945년 새해부터 5월 초까지의 전황, 일반 시민들과 병사들의 상황까지 상세하게 조명한 역작이다. 스탈린은 베를린을 점령해 달렘에 위치한 카이저빌헬름 연구소를 연합군보다 먼저 차지하고자 했다. 카이저빌헬름 연구소에는 독일이 비축한 우라늄과 핵무기 연구 자료가 있었다. 스파이의 첩보로 미국의 핵무기 제조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를 알게 된 소련은 독일이 축적한 연구 자료가 절실했다. 이것이 소련이 베를린 점령을 서두른 진정한 이유였다.

최고 사령부의 의도와는 달리 일반 소련군 병사들은 복수와 약탈에 더 주력했다. 동프로이센에 진입한 소련군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사살했다. 소련군이 진주한 곳마다 무자비한 약탈과 강간이 벌어졌다. 약탈과 강간의 피해자는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군 장교들은 부하들을 처벌하지 않았고, 대놓고 묵인하는 장교들도 적지 않았다. 소련군의 기강은 빠르게 무너졌고, 만취한 병사들이 늘어났다.

베를린은 소련의 공격에 처절하게 파괴됐다. 사진=위키백과
베를린은 소련의 공격에 처절하게 파괴됐다. 사진=위키백과



독일군은 치열하게 저항했다.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항복하면 어떤 미래가 기다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친위대 소속 장교와 병사들은 즉결 처형을 당했고, 나머지 포로들은 시베리아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다. 고립된 독일군 부대들은 피란민들과 부상병들이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해 끈질기게 버텼다. 여기저기서 패배한 독일군 잔존부대들이 베를린 시내로 밀려들었다. 시내의 건물들은 시가전을 대비해 모두 요새로 바뀌었다. 10대 소년들부터 40~50대 중년 남자들까지 ‘국민돌격대’에 편입돼 전장으로 보내졌다. 패전을 앞둔 베를린 시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도시는 죽음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내뿜는 ‘붕괴의 분위기’가 만연했다.

스탈린은 전공을 탐내는 휘하 장군들을 자극했다. 주코프의 부대가 젤로 고지에서 독일군의 반격을 받아 멈추자, 다른 방향에서 진격하던 코네프의 부대에 먼저 베를린 시내로 돌입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주코프는 병력을 총동원해 독일군 방어선을 정면 돌파했다. 부대 사이의 경쟁을 부추겨 무리한 진격을 반복한 결과 소련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베를린 공방전에 참가한 소련군의 사상자는 공식적인 집계로도 사망 7만8291명, 부상 27만4184명에 달했다. 상급자의 질책을 받은 장교들은 무모한 돌격 명령을 내렸고, 많은 병력이 뒤엉킨 상태에서 아군의 포격에 희생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종전 후에도 비극은 계속 이어졌다. 독·소전 초기 1941~1942년에 사로잡힌 100만 명이 넘는 소련군 포로들은 종전 후 귀환했으나 대부분 반역자로 몰려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을 당했다. 스탈린의 아들 장남 야코프도 1941년 7월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포로가 됐지만, 스탈린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며느리를 비롯한 장남 일가를 모조리 시베리아 유형지로 보냈다. 전쟁 중에 사지를 잃은 부상병들은 ‘사모바르’로 불리며 사회에서 따돌림당했다. 장군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베를린 점령의 공을 세우고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수 주코프도 1945년 5월 9일에 열린 승전 퍼레이드 이후 집요하게 감시당했다. 주코프의 주변 장교들은 하나씩 끌려가 고문을 받거나 숙청당했고, 주코프도 20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 중에도 주코프는 비밀 경찰에게 줄곧 도청당했다. 스탈린은 계획대로 카이저빌헬름 연구소를 접수했지만, 미국보다 먼저 핵무기를 제조하지 못했다.

소련의 공격에 파괴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사진=위키백과
소련의 공격에 파괴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사진=위키백과



소련군은 많은 피를 흘리며 베를린을 점령했지만 결국 통치할 수는 없었다. 미·영·프 연합군은 베를린을 소련이 독차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베를린은 연합군과 소련의 분할통치를 받게 되었다. ‘나치의 심장’ 베를린은 소련의 광기 어린 공격에 처절하게 파괴됐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벌어진 베를린 공방전의 기록을 접하면 누구나 인간의 본성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책의 말미에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 닥쳤던 이 운명의 순간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그중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개인의 행위에 관한 어떤 일반화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광기 어린 전장에서도 종종 병사들은 민간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죽음을 마주한 자들은 서로를 돌봤다. 그런 찰나의 휴머니즘조차 없었다면 지옥과도 같은 베를린 공방전 묘사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베를린 인근의 젤로 고지, 남쪽 소나무 숲, 도시 건설 현장에서는 매년 약 1000구에 가까운 시신이 발굴되고 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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