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과학의 역사에서 만나는 전쟁이야기

사막 외딴 도시 만들어 과학자 3000명 비밀 프로젝트

입력 2023. 08. 11   17:17
업데이트 2023. 08. 13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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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역사에서 만나는 전쟁이야기 - 핵무기 시대 출발과 여정 (하)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보안 위해 가족들까지 함께 생활
그로브스·오펜하이머의 리더십
최단기간 핵무기 개발 성공 요인

총예산 90% 제조 공정 투입하고
입자가속기에 순은 1만 톤 쓰이기도
기업들도 원자로 공장 건설 등 일조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플루토늄폭탄(Fat Man) 상공 폭발 당시의 버섯구름.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플루토늄폭탄(Fat Man) 상공 폭발 당시의 버섯구름.

 

미국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 비밀연구소에 모인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물리학자들.
미국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 비밀연구소에 모인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물리학자들.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에 건설된 U235 분리 장치가 설치된 비밀 공장.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에 건설된 U235 분리 장치가 설치된 비밀 공장.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에 걸려 있던 보안 포스터. 해당 포스터에는 “여기서 본 것, 한 것, 들은 것은 당신이 나갈 때 모두 여기에 두어야 한다”는 표어가 적혀 있다.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에 걸려 있던 보안 포스터. 해당 포스터에는 “여기서 본 것, 한 것, 들은 것은 당신이 나갈 때 모두 여기에 두어야 한다”는 표어가 적혀 있다.



이미 원자핵분열을 이용한 원자폭탄 등장의 필수조건들이 속속 갖춰지고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공식 출범에 앞서 1941년 전시 군사과학연구를 총괄하던 미 국방연구위원회(NDRC) 주관으로 원자폭탄 개발 연구 승인이 떨어졌다. 이후 1942년 9월 맨해튼 프로젝트가 공식 출범했다. 이 프로젝트가 목표를 달성한 뒤 1946년 말 공식 종료되면서 인류 최초 핵무기 개발의 숨 막히는 드라마가 일단락됐다.

공식 출범 후 채 3년을 채우기 전에 우라늄폭탄(Little Boy) 1기와 플루토늄폭탄(Fat Man) 2기가 탄생했다. 플루토늄탄 1기는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실험용으로, 그리고 나머지 2기가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되면서 인류사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컨트롤타워는 암호명 프로젝트 Y로 명명된 뉴멕시코 사막 한가운데의 로스앨러모스 비밀연구소였다. 한때 3000여 명의 과학자와 그들의 식구들이 급조된 도시에서 역사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총책임자로서 엄청난 추진력과 관리 능력으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주인공은 육군 공병의 그로브스 장군이었다. 그는 때때로 갈등의 순간들을 맞이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프로젝트의 2인자이자 최고의 과학보좌관인 오펜하이머를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오펜하이머는 프로젝트를 통해 천재 물리학자로서의 연구성과와 능력뿐 아니라 현대 과학자가 갖추어야 하는 필수 덕목인 관리자이자 행정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줬다. 이는 원폭 개발 성공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중심 연구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시카고대학을 위시한 여러 대학과 기업연구소 등에 흩어져 있던 페르미, 질라드, 프랑크, 로렌스 등 노벨상 수상자 반열의 최고 과학자 집단이 조용히 참여하고 있었다. 전체 프로젝트 목표와 규모는 대통령 외 몇몇 지휘부 군인과 과학자들만의 철저한 비밀 속에 진행됐다. 심지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하고 1945년 4월 부통령이었던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한 후 맨해튼 프로젝트의 첫 보고를 받고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여하간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에서 보안 중심의 원칙하에 연구자 개개인들이 가급적 접촉하지 않은 채 극히 제한적으로만 정보를 공유하는 수행 방식을 요구했던 그로브스 장군 등 군사지휘관들과의 갈등 속에서 미묘한 균형감으로 타협해나갔다. 과학자들 간의 효율적인 역할 분담 체계 속에서도 자유로운 토론과 개방적 정보 공유 환경 및 방식을 지켜냄으로써 결국 최단기간 내 최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핵폭탄 개발의 중요한 이론적 결과들이 나와 있기는 했지만, 단기간에 실제 이론만큼 위력을 가진 폭탄 제조를 위해 알아내고 미리 만들어봐야 하는 일들이 태산이었다. 우라늄 자연광물 중 원료가 되는 극소량의 우라늄 U235(0.7%)를 어떻게 단기간에 대량 추출해 폭탄을 만들 수 있을지, 또한 우라늄보다 성능이 좋으나 제어가 어려운 플로토늄(Pu239) 원료를 재처리하고 추출해서 투하 전까지 터지지 않는 핵폭탄으로 생산할 수 있을지 등 고난도 문제 덩어리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프로젝트팀은 최고 책임자들의 뛰어난 리더십 아래 최단기간에 놀랄 만한 협업과 집중력으로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

프로젝트에서는 과학기술 연구개발 활동뿐 아니라 제조 공정에서의 시행착오와 실패, 그리고 다수의 현장 인력이 동원됐다.

사업 총예산 20억 달러(현재 가치 약 30조 원)의 90% 가까이가 우라늄과 플루토늄 원료 추출 공장과 원자로 건설 등 제조 공정에 투입됐다. 실제 개발과 조립에는 10% 정도의 예산만 쓰였다고 한다. 일례로 TVA(테네시프로젝트) 댐 건설로 전력이 풍부했던 테네시주 오크리지에는 U235를 추출하기 위해 거대 공장이 세워지고 초대형 입자가속기(사이클로트론)가 설치됐다.

입자가속기 안의 핵심 부품인 전자기석을 감는 금속 코일이 대거 필요했는데 구리가 군수물자 제조로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대체재로 당시 가치 무려 3억 달러에 해당하는 1만3000여 톤의 순은이 사용됐다. 공장 인력 역시 수만 명에 달했다.

또한 산업체들이 폭탄 제조와 생산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가령 워싱턴주 리치랜드 핸포드에 듀폰사가 플루토늄 추출 원자로 공장을 건설하고 역시 수만 명을 고용하면서 생산에 일조했다. 듀폰사는 과거 자체 연구소 과학자들의 기초연구를 통해 나일론이라는 희대의 성공작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듀폰식 산업연구개발 관리모델을 플루토늄 폭탄 제조 생산 공정에 적용했고, 이 과정에서 거대 군수기업으로 성장해갔다.

1945년 5월 8일 마침내 독일은 항복했다. 히틀러의 통제를 받던 하이젠베르크 등 독일 과학자들의 태업 때문이었는지, 실제 원자폭탄을 게임체인저로 보지 않았던 히틀러의 판단 실수 때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다. 하지만 히틀러가 핵무기 개발에 집중하지도, 괄목할 만한 진척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에 미국 대통령을 설득시키면서 핵무기 개발을 재촉하러 뛰어다녔던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망연자실했다.

과학자들은 뒤늦게나마 다시 미국의 원폭 개발을 멈추고자 정치인들을 만나러 쫓아다녔으나, 이미 계획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과학자들은 비록 무기 개발의 출발을 앞당길 수 있었지만, 무기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매우 무력했다. 물론 미국의 원폭 투하 결정을 둘러싼 역사적 논란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위정자들은 전후 핵무기 독점과 그에 따른 군사 패권국 지위 독점의 가능성을 보았기에 그러한 결정을 단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1945년 7월 16일 플루토늄폭탄 실험은 성공했다. 놀랄 만한 파괴력을 눈앞에서 확인한 일부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한 불안감은 3주 뒤 8월 6일 히로시마의 우라늄폭탄 투하와 8월 9일 나가사키의 플루토늄폭탄 투하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엄청난 죄책감으로 증폭됐다. 그들은 평생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 피해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어 상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다만 인명 손실을 막고 일본의 패전을 앞당기겠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원폭 투하는 현재까지도 미국 역사의 최대 오점과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투하 사진을 선명하게 얻기에 좋은 일본의 주요 도시 중심부만을 골라서 투하 목표로 삼았던 작전 계획의 결정과 실행으로 투하 후 1년여 기간 내에 대부분 민간인이었던 20여 만 명이 죽고 이후로도 100만 명 정도가 지속적인 후유증에 시달렸다. 사진=위키미디어

필자 박영욱 (사)한국국방기술학회 이사장은 서양과학기술사를 전공한 뒤 20여 년간 국방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글로벌 싱크탱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필자 박영욱 (사)한국국방기술학회 이사장은 서양과학기술사를 전공한 뒤 20여 년간 국방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글로벌 싱크탱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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