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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역사 이 손끝에서 기록됐다

입력 2023. 07. 26   16:28
업데이트 2023. 07. 2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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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취재 종군기자 한영섭과 JSA경비대대원들의 만남 

1950년 6·25 발발 최초 보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현장 취재
‘전쟁의 진실’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목숨 걸고 전쟁터 누벼
‘어머니~’ 병사의 외침 아직도 귓가에…목숨으로 지킨 평화 잊지 않기를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JSA경비대대를 방문한 한영섭(가운데) 6·25종군기자동우회장이 장병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JSA경비대대를 방문한 한영섭(가운데) 6·25종군기자동우회장이 장병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다.


전쟁은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는 종군기자의 손끝에서 기록된다. 1953년 7월 27일 종군기자들은 숨을 죽이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채웠다. 
정전협정 현장을 취재했던 유일한 생존 종군기자 한영섭(94) 6·25종군기자동우회장이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을 지키는 JSA경비대대원들을 만났다. 한 회장은 당시 취재 뒷이야기와 6·25전쟁의 교훈, 국가안보의 중요성 등을 들려줬다. 


종군기자가 전하는 정접협정 당시 상황

이른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린 지난 17일. JSA경비대대를 방문한 한 회장이 손자보다 어린 장병들을 한 명씩 안아주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장병들의 질문에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가장 먼저 이윤성 상병이 정전협정 체결 현장 상황을 물었다. 한 회장은 “판문점 회담장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50여 명의 내·외신 종군기자들은 4~5채의 회담 막사 주변에서 발표를 초조하게 기다렸어요. 당시 한국중앙방송국(현 KBS) 기자였던 저는 A4 용지 크기의 휴대용 녹음기를 어깨에 메고, 속보를 전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습니다. 타 매체 기자들도 수첩에 펜을 고정하고, 회담장 상황을 예의주시했죠”라고 답했다.

한 회장은 회담장 안에는 오전 10시 정각에 윌리엄 해리슨 중장을 수석대표로 하는 유엔군 측 대표단이 입장했고, 반대편에서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 대장 일행이 들어와 악수나 눈인사도 없이 자리에 앉더니 탁자 위에 놓인 각 18통의 협정서에 서명만 계속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T자형으로 된 220평의 조인식 건물 동편에는 참전 유엔 18개국 대표들이, 서편에는 북한군 장교들, 남쪽에는 중공군 장교들이 앉아있었다고 부연했다.

그는 회담장 밖의 상황도 생생히 기억했다. “양측 수석대표가 서명하는 동안에도 유엔군 폭격기가 회담장 인근 북한군 진지에 폭격을 가해 긴장된 식장의 공기를 흔들어놨어요. 증오에 찬 원수끼리 급하게 서명만 하고, 10시12분에 기념촬영도 없이 헤어졌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보도하기 위해 내·외신 기자들은 뜨거운 취재 열기를 보였어요. 그런데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어요. 유엔 측 기자단은 100명이나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개가 넘었는데 말이죠. 그 부분이 아쉬울 뿐입니다.”

언론인을 지망하는 주양우 일병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와 포연탄우(砲烟彈雨) 속에서 어떻게 취재를 이어갔는지 궁금해했다. 한 회장은 근접거리에서 남쪽 종군기자들의 얼굴 사진을 찍던 북한기자를 떠올렸다.

“‘보도’ 완장을 찬 북한기자들이 모든 남한기자들의 사진을 찍어가더라고요. 한번은 ‘사진 찍지 말라’고 강력하게 얘기했는데, 소용없었어요. 남한기자들은 그들이 기자로 둔갑한 보위부 사람이라고 수군댔죠. 북한기자가 인삼주를 건네 사이좋게 얘기하다가도 공산당 체제 논쟁이 불거지면 격하게 반발하며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어 한 회장은 “죽음 앞에서 신음하는 장병들의 최후를 지켜보면서 떨리는 손으로 기사를 써야 했다”며 “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종군기자로서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신념과 사명감을 갖고 취재했다”고 덧붙였다.


전쟁터 누비며 생사 기로에

한 회장은 6·25전쟁 발발을 최초로 보도하며 종군기자로서 맹활약을 예고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쯤 당직이었던 위진록 아나운서가 긴급사태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해왔어요. 국방부에 근무하는 한 장교가 가져왔다는 보도자료 내용이 너무나 막연해 진상 파악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방송과장과 함께 곧장 국방부로 가서 이선근(당시 대령) 정훈국장을 만나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한 회장은 이 대령과 함께 작성한 원고를 갖고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오전 7시 정규방송 전인 오전 6시40분. 그는 ‘각처로 흩어져 있던 국군장병들은 속히 귀대하라’는 비상소집 명령을 뉴스 속보로 처음 보도했다. 한 회장은 “‘전면전인 것 같다’는 이 대령 말에 종군기자 훈련받은 걸 써먹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며 “그땐 겁 없던 스물세 살이었다. 일단 전쟁터에 들어가면 끝을 보고 싶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한국 최초의 종군기자인 한 회장을 시작으로 전쟁이 발발하면서 종군기자는 43명까지 늘었다. 종군기자들은 실제 전장을 취재해야 하기 때문에 각급 부대에 파견돼 목숨을 걸고 현장을 따라다녔다.

조웅제 상병은 “종군기자로서 위험한 상황이 많았을 것 같은데, 목숨을 잃을 뻔한 경우도 있었냐”고 질문했다. 한 회장은 생사가 오갔던 현장이 떠오른듯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강원도 철원을 지나 함경남도 원산으로 가는데 차량이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머리 위에서 총알이 막 쏟아지는 거예요. 그때 갑자기 운전석 쪽이 ‘쿵’하고 울렸고, 옆에 있던 병사가 내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신음을 내더라고요. 저는 병사의 총을 들어 미친 듯이 언덕을 향해 쐈습니다. 병사는 ‘어머니’를 부르면서 숨을 거뒀어요. 아직도 그 병사의 마지막 외침이 귓가를 맴돕니다.”

끝으로 최범기 병장은 3년여 동안 전쟁터를 누비며 숱하게 목숨을 내놨던 한 회장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그리고 후배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여쭸다.

“평화는 절대 돈으로 살 수 없어요. 위기의식 없이 잘못된 안보의식을 갖는다면 제2의 6·25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적과 대적할 수 있는, 적의 어떠한 도발도 즉각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과 하나 된 국방·안보 의식이 필요합니다. 특히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정신무장이 확고해야 합니다. 선배 전우들이 목숨으로 지킨 대한민국을 이제는 여러분들이 튼튼하게 지켜주길 바랍니다.” 글=조아미/사진=이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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