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인간

전쟁·가난·폭력·차별 이겨낸 엄마에 대한 헌사

입력 2023. 07. 19   17:06
업데이트 2023. 07. 19   17:52
0 댓글

전쟁과 인간 - 엄마의 잃어버린 명예 
- 그레이스 M. 조, 『전쟁 같은 맛』

미 이민 2세대 학자가 복원한 삶
기지촌서 만난 미국인 선원과 결혼
동경했던 미국 이주 했지만 차별
불굴의 의지 적응 노력에도 조현병
학문적 추적 통해 삶·명예 되살려

1960년대 이태원의 풍경. 필자 제공
1960년대 이태원의 풍경. 필자 제공

 

『전쟁 같은 맛』 한글판(왼쪽)과 영문판 표지.
『전쟁 같은 맛』 한글판(왼쪽)과 영문판 표지.

 

『전쟁 같은 맛』 한글판(왼쪽)과 영문판 표지.
『전쟁 같은 맛』 한글판(왼쪽)과 영문판 표지.

 

그레이스 M. 조(왼쪽) 미국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대 사회학·인류학과 교수가 지난달 28일 경기 파주시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인터뷰를 한 뒤 아들 펠릭스 군과 한국 및 미국에서 각각 출간된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레이스 M. 조(왼쪽) 미국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대 사회학·인류학과 교수가 지난달 28일 경기 파주시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인터뷰를 한 뒤 아들 펠릭스 군과 한국 및 미국에서 각각 출간된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1970년대 미국의 시골 마을에서 엄마는 ‘블루베리 여사’로 불렸다. 엄마는 숲에서 달래와 우엉, 블루베리를 땄고, 지붕에서 고사리를 말렸다. 엄마는 김치를 담그려 ‘나퍼 캐비지’라고 부르는 배추를 찾으러 다녔다. 이방인을 경계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든 한국음식을 나눠줬다. 엄마는 한국에서 상선 선원인 미국인 남성과 결혼했다. 1972년 여름, 부산에서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 워싱턴주 작은 마을 셔헤일리스로 이주했다. 

“함 묵자.” 어머니는 김치 한 통을 손에 들고 ‘모국어’로 말했다. 당시 미국에는 6·25전쟁 이후 이주한 다문화가정자녀나 전쟁고아들이 늘고 있었다. “엄마는 이 아이들에게 김치만큼은 떨어지지 않게 하겠노라 작심했다. 엄마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당신이 먹여야 할 입이라는 걸 알아봤고, 잠시나마 그 애들이 잃어버린 한국 엄마가 돼줬다.”

어머니의 한국 이름은 ‘군자’(1941~2008)였다. 군자의 딸 그레이스 M. 조는 미국에서 성장해 브라운 대학과 하버드 대학을 거쳐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가 됐다. 엄마가 사망한 후 그레이스는 여성, 피식민자, 억압받는 자라는 키워드로 자신은 몰랐던 어머니의 과거를 조사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엄마의 삶에는 인종과 젠더, 전쟁과 디아스포라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레이스는 오랜 연구 끝에 엄마의 삶을 복원한 저서 『전쟁 같은 맛』을 출간했다. 이 책은 2021년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2년 아시아·태평양 미국인 도서상을 수상했다.

군자는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군자의 가족은 광복 후 귀국했다. 곧이어 발발한 6·25전쟁으로 그녀는 아버지와 오빠, 작은 언니를 잃었다.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던 군자는 부산으로 갔다. 군자는 미군기지 앞 기지촌에서 일했다. “젊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라곤 공장 아니면 미군기지뿐이었다. 기지촌 일자리는 공장보다 노동 시간이 짧았고, 수입도 더 좋았다. 결정적으로 기지촌은 미국의 화려함을 약속했고, 미군 병사와 가정을 꾸려 미국으로 이민 갈 가망도 줬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엄마를 비롯한 수백만 명의 여성에게 이는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미군기지에서 여자들은 다양한 일을 했다. 한국인들은 미국을 동경하는 만큼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한국 여성들을 혐오했다. 그들에게는 ‘양공주’라는 낙인이 찍혔다.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낙인은 너무나도 심각해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군자는 기지촌에서 한 미국인을 만났다. 그는 한국, 괌, 필리핀, 베트남의 미군기지에 군수품을 공급하는 상선의 선원이었다. 군자는 아들을 낳아 거의 홀로 키웠다. 남편이 될 미국인은 당시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6·25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흔히 ‘혼혈아’라 불리던 다문화가정자녀들은 철저한 따돌림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양부인과 혼혈 아동’의 존재를 ‘사회적 위기’라고 명명하면서 ‘미군 아기 문제’를 입양으로 해결하려는 대통령령을 선포했다.

한편 한국인 남성들에게 군자와 같은 여성은 열등감과 혐오를 동시에 자극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군자는 혼혈인 자식을 포기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겠다고 결심했다. 딸 그레이스를 낳은 후 군자는 마침내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그토록 동경했던 미국에서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차별이었다. ‘칭크(Chink·중국인의 멸칭)’ ‘잽(Jap·일본인의 멸칭)’이라 불러대는 멸시를 받은 그레이스는 처음에는 “나는 한국인이야”라고 항변한다. 항변은 차츰 “나는 반(半)한국인이야” “우리 아빤 미국 사람이야”라는 변명으로 바뀐다.

군자는 불굴의 의지로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군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한국음식을 만들어주고 미국음식을 익히며 인심을 얻었다. 전쟁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군자는 딸이 미국에서 훌륭한 학자로 성장하길 바랐다. 군자의 바람대로 그레이스는 명문 브라운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열다섯 살이 된 1986년 무렵부터 군자는 주변인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해치려 한다는 강박증이 생겼다. 군자는 집 밖으로 나가길 거부하면서 세상과 스스로 단절했다. 대학 진학과 사업 등으로 바쁜 가족들은 군자를 방치했다. 1990년대에야 군자는 공식적으로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레이스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어머니가 기지촌 여성으로 일하면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고, 어머니의 과거와 사회적 죽음을 학문적으로 추적해야 한다는 부채감이 생겼다. 모든 질병은 사회와 연결된다. 군자는 오늘날 정신의학에서 거론되는 조현병 발병의 사회적 요인 대부분을 안고 있었다. 유년기에 겪은 공포,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 신체적 학대, 성적 트라우마, 이민 경험, 인종차별…. 엄마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그레이스는 엄마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하나씩 알게 된다.

특히 엄마의 음식 만들기는 아픈 기억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안간힘이었다.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 엄마에게 밀크 파우더(우유 분말)를 먹이려고 하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이 맛을 참을 수가 없어. 전쟁과 같은 맛이 나.” 먹고살려고 미군기지 쓰레기통을 뒤졌던 격렬한 굶주림의 기억은 엄마의 삶을 지배했다. 이주한 한국인들에게 엄마가 계속 김치를 나누어줬던 이유에 대해선 “매일같이 먹고 요리하는 일이, 우리가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들과 장소에 우리를 연결시켜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레이스는 “내 성공은 엄마가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요, 내 교육은 엄마에게 다시 주어진 기회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의 과거를 따라가면서 그레이스는 자신이 살지 않았던 시대의 고통을 ‘맛’으로 통감한다. “자, 김치 더 무라. 그레이스야, 우린 생존자야. 너는 무엇이든 견딜 수 있어.” 그레이스는 확신한다. 엄마는 ‘타락한 여자’나 ‘정신병자’가 아니다. 그녀는 전쟁과 가난, 폭력과 차별을 이겨낸 명예로운 여성이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