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46) 6·25참전유공자회 이정훈 지평면분회장

입력 2023. 07. 17   16:28
업데이트 2023. 08. 0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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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통에 고향 쑥대밭 
취직하러 미군 들어가
세수는커녕 야산 보초 
뒤섞여 취침 많이 울었지
전쟁은 비극 
강해져야 다시는 겪지 않아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 46. 6·25참전유공자회 이정훈 지평면분회장

중공군 들이닥친다 소문에
마을 버리고 피란길
잘 곳 없고 굶주려
‘차라리 고향 집에서 죽자’
다시 집으로

돈 벌러 미군 8240부대 입대
민간인도 군인도 아닌
‘계급도 군번도 없는’ 처지 서러워
부대 나왔다 재입대 고초도

지금도 미군 보면 친근
여러분 선배 덕에 이만큼 잘 산다
식사라도 대접하고파

이정훈 6·25참전유공자회 지평면분회장이 인터뷰를 마친 뒤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전시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훈 6·25참전유공자회 지평면분회장이 인터뷰를 마친 뒤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전시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지평리전투기념관 전시물을 소개하는 이정훈 옹.
지평리전투기념관 전시물을 소개하는 이정훈 옹.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토박이’ 이정훈 6·25참전유공자회 지평면분회장은 70여 년 전 초토화된 마을을 떠올렸다. 16세였던 이옹은 지평리전투가 끝난 1951년 2월, 전쟁터 한복판에서 처참한 광경에 경악했다. 소년티를 벗지 못한 어린 나이에 끔찍한 전쟁을 겪고, 미 ‘8240부대’에서 활약한 이옹을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마흔여섯 번째 사연의 주인공으로 소개한다.

글=조수연/사진=양동욱 기자


목숨 걸고 돌아온 고향, 처참히 망가져

1951년 1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가을걷이를 마치고 여유로운 농촌에 중공군이 들이닥친다는 소문이 퍼졌다. 16세 이옹에게도 청천벽력이었다.

“국군이고, 미군이고 중공군에 밀리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어요. 마을 사람 모두 피란을 결심하고 보따리 싸기에 바빴습니다.”

장남이었던 이옹은 부모님, 다섯 동생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식구들이 덮을 수 있는 이불, 수저, 소량의 식량을 소에 싣고 남쪽을 향해 정처 없이 떠났다.

어린 동생들과 소를 몰고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겨우 20리(약 7.8㎞) 정도. 중공군은 가족의 걸음보다 더 빨리 뒤쫓아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식량이 떨어진 것이다.

“피란지 동네 집의 부엌이나 헛간을 빌려 볏짚으로 바닥을 깔고 생활했어요. 게다가 소를 팔아 마련한 식량과 유엔군이 배급해 준 곡식도 떨어져 굶어 죽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자 이옹과 가족들은 전선이건, 적지건 죽을 때 죽더라도 고향 집에서 죽는 게 낫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지평리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군 전투기가 우리를 중공군으로 잘못 보고 기총사격을 하더라고요. 간이 콩알만 해졌죠. 오도 가도 못할 때 우연히 만난 미군이 지프차로 집까지 태워 줘 살았어요.”

그리운 집은 엉망이었다. 중공군이 문짝을 떼어 내 장작으로 써 버렸고, 살림살이는 모두 부서져 있었다. 마을 앞에는 각종 군용 차량이 오갔다. 밤에는 조명탄이 하늘을 대낮처럼 밝혔다. 박격포 포탄과 기관총·소총 소리가 뒤엉켜 울려 퍼졌다. 이옹과 가족들은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려 공포의 밤을 보냈다.

“삼촌하고 미군들이 호를 파는 걸 도와줬어요. 그러면 우리한테 필요한 속내의를 한 벌씩 수고비로 줬습니다.”

며칠이 지났을까?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을 물리쳤다는 승전보가 전해졌다. 이옹과 가족들은 불꽃 튀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다는 기쁨으로 피란 때 꾸렸던 짐을 풀었다.

이옹은 양평에 주둔하던 미 제1기병사단에 들어가 근무했다. 부대로 가기 위해 지평리를 지나는 길, 이옹이 마주한 마을은 끔찍했다. 집은 불타 없어지고, 논과 밭은 쑥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전투가 벌어진 사흘 동안 중공군과 미군 8000여 명이 죽었다. 가옥 500여 채가 전소돼 지평리에 남아 있는 집은 양조장과 두 곳뿐이었다.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면 월급을 주겠다고 해서 잠깐 일을 했습니다. 미군 부대로 가는 길마다 중공군 시체가 보였고, 벌판에는 탄피가 산같이 쌓여 있었어요. 찬 바람 불던 쓸쓸한 지평리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군번도 없이 가족과 생이별

그로부터 1년 후인 1952년 5월, 이옹은 우연한 기회에 미군 지원으로 편성된 8240부대에 입대했다.

“미군이 서울 돈암동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한다더군요. 미군 부대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취직을 시켜 준다고 해서 지원했습니다. 미군 트럭 5대가 와서 강원도 속초로 데려가더니 ‘너희들은 이제부터 군인’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가족과 생이별했죠.”

8240부대는 미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창설돼 후방지역 교란과 유격기지 건설, 첩보 수집 등의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2중대에 배속된 이옹은 속초 일대에서 공중·해안침투, 첩보 수집, 기관총사격 등의 교육을 받았다.

“계급도, 군번도 없었어요. 팔뚝에 파란 리본을 꽂으면 1중대였고, 우리 2중대는 노란색 리본이었습니다. 밤에도 무기가 고장 나면 분해·결합할 수 있도록 눈을 가리고 훈련했어요. 야산에서 한 달 반 동안 보초를 서기도 하고요.”

고된 훈련은 둘째치고 가족과 떨어진 상황은 어린 소년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집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눈물 흘린 날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석 달 동안 세수도 못 하는, 그런 훈련을 했습니다. 잠자리도 육각텐트에 1개 분대를 집어넣어 간신히 쪽잠만 잘 정도였어요. 그 와중에도 ‘어머니가 얼마나 애타게 날 기다릴까’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렇게 이옹은 군번도, 계급도 없이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8240부대의 활동은 당시 군사기밀로 취급됐고, 정전협정 이후에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군번 없는 군인’이었던 이옹은 민간인도, 군인도 아닌 처지가 서러워 1953년 7월 부대를 나왔다. 이어 1955년 10월 28사단 포병부대 위생병으로 재입대하는 고초를 겪었다.


지평리전투 홍보대사로 활약

현재도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를 지키고 있는 이옹은 지평리전투 ‘홍보대사’를 자처했다. 2009년 양평문화원이 출간한 책 『지평리를 사수하라』에도 이옹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

또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을 찾는 군인·학생 관람객들에게 전쟁사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기념관을 방문한 빈센트 브룩스 전 한미연합군사령관, 토머스 밴달 전 미8군사령관과 찍은 사진을 꺼내 보였다.

“미군들이 오면 미군 부대에서 근무했다는 동질감이 있으니까 친근하게 대화해요. ‘여러분의 선배들이 지평리에서 싸워 줘 지금 우리가 이만큼 잘 산다’는 고마움도 전했습니다.”

6·25참전유공자회 지평면분회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참전용사들도 살뜰히 챙기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지평리에 참전용사들이 100명 넘게 있었는데, 이제 15명 정도밖에 없어요. 늙은이들이 말하는 걸 누가 들어주고 알아주겠어요. 올해도 ‘여러분을 위해 내가 최선을 다해 식사라도 대접하겠다’고 했죠.”

이옹은 후손들에게 작은 소망을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전쟁이란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으려면 ‘언제든 나라를 위해 총 들고 나가 싸우겠다’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애국’입니다. 우리 후배 장병들도 가족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부여된 임무 완수에 힘을 쏟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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