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저널 스페셜
서울, 역사의 현장을 찾아-난공불락 요새화 계획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이 북악산을 넘어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가 발생했다. 국가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사건의 여파는 컸다.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됐고 유격훈련이 도입됐다. 군 복무기간도 육군과 해병은 30개월에서 36개월로, 공군과 해군은 36개월에서 39개월로 늘어났다. 향토예비군과 전투경찰(전경)이 창설됐고,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교련 수업을 받아야 했다. 신원 확인을 위한 주민등록증도 발급됐다. ‘서울 요새화 계획’은 이러한 과정에서 나왔다. 요새화 계획의 핵심 프로젝트는 남산터널이었다. 글=이주형/사진=조종원 기자
● 남산1호터널…방공호로 설계, 명동~경부고속도로 최단 교통로
● 북악스카이웨이…청와대 방위체제 재정비 산물, 야경 명소로
● 을지로 지하상가…서울시청 대피시설, 전통 간직한 지하시장으로
● 북촌 연막탄 지주…연막·조명탄 발사대, 12개 미래유산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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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1호터널은 서울 명동 도심에서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하는 최단거리 교통로다. 북쪽 퇴계로2가 교차로에서 시작해 남산 밑을 관통, 한남동에 이른다. 항상 밀려드는 차로 붐비는 곳.
지난달 27일 서울시가 밝힌 남산터널 이용현황(5월 22~26일)에 따르면 일평균 통행량은 4만8376대였다. 1호터널이 없었으면 서울의 교통 혼잡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1호터널은 교통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사실 다른 목적도 있었다. 남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2호터널과 같이 유사시 서울시민이 대피할 수 있는 방공호 기능도 겸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 계기는 1968년 1·21사태였다.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린 이 사건 다음 해인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싸우며 건설하는 해’를 표방하며 북한의 위협에 구체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서울 요새화 계획은 이러한 배경 아래 진행됐다.
이와 관련된 동아일보 1969년 1월 7일자 내용이다.
“7일 김현옥 서울시장은 400만 서울시의 요새 건설을 위해 100억 원 규모의 예산을 세웠다고 밝혔다. 김 시장은 오는 6월 말까지 서울시의 요새 건설을 위해 모든 계획을 짜서 서울시 도시계획사업 부록에 올린 후 금년 후반기에서 연말까지 사이에 모두 완성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가 마련한 100억 원의 예산은 여의도 건설사업 등 각종 공사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이 요새 건설에는 각종 군사도로·한강하저터널 등이 들어 있다.”
두 달이 지난 3월 4일 김현옥 시장은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공표했다. 서울 요새화 계획에 이은 남산 요새화 계획이다. 2개의 남산터널을 착공하겠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터널은 중앙방송국~보광동 수원지의 1450m(1호터널)와 후암동 군인아파트~장충체육관의 1400m(2호터널)로 나뉘며 3월 중 착공, 1호터널은 다음 해 6월까지 완공하기로 했다. 특히 노폭 9.5m, 높이 8.1m의 터널이 완성되면 하루 3만5000대의 차량을 소화해 서울시 교통난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군사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을 것이라는 게 당시 김 시장의 설명이었다. 그러면서 1호터널과 2호터널의 교차지점은 입체교차로로 하고, 그 부근에 5000~7000평(약 1만6000~2만3000㎡)의 교통광장과 관광객을 위한 상사를 세워 남산 지하도를 서울의 새 명소로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교통광장은 유사시 방공대피소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같은 달 한국신탁은행으로부터 개발신탁자금을 지원받아 착공에 들어갔고, 1970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해 개통됐다. 총 공사비 15억6900만 원을 투입한 남산1호터널은 당시만 해도 길이와 규모 면에서 국내 최대 터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산1호터널은 통행료를 징수했다. 착공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 7월 31일 서울시 조례(제630호)에 의해 유료화돼 한국신탁은행이 자회사인 ‘한신부동산’을 통해 통행료를 징수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통행량이 적어 적자는 계속됐고, 남산1호터널은 1974년 11월 1일 서울시로 인수됐다.
문제는 또 있었다. 남산1호터널은 개통 직후부터 물이 새고 환기가 잘 안 돼 여러 차례 보수해야 했다.
전면적인 검토 결과 터널 확장 대신 기존의 터널 옆에 새로운 터널을 뚫기로 했다. 새 터널은 1989년 5월 25일 착공해 1994년 1월 8일 공사를 마쳤다. 기존 터널과는 15m 간격이다. 기존 터널은 상행선용, 신터널은 하행선용인 현재의 남산1호터널이 완성됐다.
남산2호터널의 운명은 또 달랐다. 사실 2호터널은 1호터널에 비해 교통 기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북한의 도발에 맞서 시작됐던 남산1·2호터널의 방공호 겸 교통광장은 결국 반대여론과 공사비, 기술적 문제로 백지화되는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남산1호터널은 남북 간선도로망의 중추로 떠오르며 주로 동서로만 발달했던 서울의 판도를 바꿨다. 강남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며 서울 남북 발전의 계기가 된 것. 1호터널은 여전히 시민들의 주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심에 집중 건설된 지하상가도 시민들의 대규모 대피시설 목적으로 조성됐다. 1970년대 서울 도심에 만들어진 을지로, 회현, 동대문 등 지하상가는 애초 서울시민의 방공호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시민 대피뿐만 아니라 수도 서울 사수를 위해 서울시청 대피도 감안한 게 바로 시청역에서 을지로6가까지 이어지는 을지로 지하상가였다. 비상시 서울시청을 이곳 지하로 옮겨 버티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후 도심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지상 상권이 지하로 흘러들어 왔고, 이들 지하상가는 지금까지 30여 년의 전통과 특색을 간직한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백악산). 이 산줄기에 만들어진 북악로(북악스카이웨이)는 남산서울타워와는 또 다른 각도로 서울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나선형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에는 잘 정비된 가로수와 계절마다 피고 지는 다양한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특히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 오르면 ‘서울의 하늘길’ 아래로 시내 전경이 보인다. 평화롭기만 한 광경이다. 하지만 이곳 또한 1·21사태와 얽힌 사연이 있다.
1·21사태 이후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과 인왕산, 그리고 이른바 김신조 루트로 불리던 우이령길은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됐다. 또 북한산 자락의 평창동과 청와대 인근 성북동을 개발해 무장공비가 쉽게 활보할 수 없도록 했다. 북악스카이웨이는 이러한 과정에서 건설됐다.
서울역사편찬원에서 펴낸 『서울지명사전』에 따르면 북악스카이웨이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침투사건 이후 수도권 경비 강화와 산책로를 위해 개통됐다. 1968년 2월 9일 서울시에서 수도 방어와 관광도로 목적의 ‘스카이웨이’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사직동에서 돈암동 구간을 2월 21일 착공해 그해 9월 28일 완공한 것이다. 이 길은 1972년 11월 26일 한양 천도 578주년 기념일에 북악로로 이름 붙여졌다.
1984년 11월 7일 서울시 공고 제673호에 의해 북악로는 지리적 위치와 교통 흐름을 감안해 창의문을 기준으로 북악산길과 인왕산길로 분리됐다. 현재 북악산길은 종로구 부암동 257번지(창의문)에서 미아리고개를 거쳐 성북구 종암동 29-14번지(종암로)에 이르는 폭 10~15m, 길이 7150m의 2차로를 말한다. 인왕산길은 종로구 필운동 142번지(사직동)에서 옥인동을 거쳐 부암동 257번지(창의문)에 다다른다.
북악스카이웨이는 한동안 유료도로로 운영됐다. 완공 전인 1968년 8월 15일부터 통행료를 받기 시작했다. 통행료는 1976년 7월 16일 폐지됐다.
북악스카이웨이는 지금도 서울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로 꼽히며 야경을 감상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태생은 남북 대립과 청와대 주변 방위체제 재정비의 산물이었다.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드문드문 서 있는 시설물을 가리키자 전봇대 아니냐는 대답이 나온다. 열 번 물어도 다 똑같은 답변이다. 맞는 말이다. 여기저기 뻗쳐 있는 전선을 걸친 모습이 전봇대가 분명하다.
그런데 여느 전봇대와는 다르게 생겼다. 길이도 일반 전봇대보다 3분의 1가량 길고, 꼭대기 모습도 사다리꼴 내지 가로등 모양이다. 속은 텅 비어 있으며, 철제로 만들어졌다.
여태껏 봐 온 눈에 익은 형태가 아니다. 사실 이 전봇대의 정체는 이름도 생소한 ‘연막탄 지주’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인근인 삼청동과 청운동 곳곳에 설치된 일종의 군사시설물이다. 높이는 10~15m에 이르며 낮엔 짙은 연기를 내뿜는 연막탄 발사대 지주로, 밤에는 조명탄을 발사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청와대를 방호하고 군사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연막탄 지주의 소유처는 육군수도방위사령부 1방공여단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군사시설물 기능은 상실되고 장기간 방치됐다. 더욱이 좁은 보도에 설치돼 통행에 불편을 초래하는 데다 오랫동안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주변 경관을 해친다는 민원도 계속 제기됐다.
이에 따라 해당 지방자치단체인 종로구청은 군과 함께 관내 연막탄 지주를 조사했다. 그 결과 삼청동 51개, 청운동 17개 등 총 68개가 설치된 것을 파악했다. 이어 2013~2014년 역점 사업인 도시비우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통신선로와 가로등 지주로 사용돼 존치가 불가피한 지주 12개를 제외한 나머지 56개를 철거했다. 남아 있는 12개의 지주는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됐다.
각각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자하문로24길 43, 효자로13길 58, 자하문로16길 4, 북촌로15길 27, 삼청로 108-17, 삼청로 108-12, 삼청로9길 55-6, 북촌로11길 62, 팔판길 16, 팔판길 38, 팔판길 30, 세종대로 159.
북촌 한옥마을을 둘러보다 특이한 전봇대를 발견하면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어떨까. 1960년대 청와대 방호와 군사작전 수행 등을 위해 설치된 군사시설물이자 과거 냉전시대의 극한 남북 대결을 상징하는 연막탄 지주. 역사의 흔적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주변에 살포시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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