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 말도 없이 극비리에 진행된 입대작전
총알 빗발치던 첫 임무…
함께했던 전우들의 투혼 기억됐으면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45> 류병추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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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전쟁사(史)가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펼친 장사상륙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 개시 하루 전 772명의 학도병은 장사리에 상륙해 북한군의 주의를 흩트렸다. 적은 이 지역에 2개 사단을 배치하고 집중적인 방어에 들어갔다. 적이 완전히 속은 것이다. 18세에 장사리전투에 참전한 류병추(91)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장을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마흔다섯 번째 주인공으로 소개한다. 글=조수연/사진=이경원 기자
후방 근무 배치에도 일선으로 향해
류 회장은 1950년 8월 고향 대구에서 부모님을 도와 사과농사를 짓던 중 급하게 군인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망설임 없이 육군본부 직할 제1유격대대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그의 나이는 고작 18세였다.
“과수원에 모병하는 방위군이 와서 나이도 어리고 학생이니 후방 근무를 하라더라고요. 이왕 전쟁에 나가는 거 어떤 고난이 있어도 나라를 위해 일선에서 싸우자는 생각이 울컥 들었죠. 그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2남 2녀 중 맏이였던 류 회장의 ‘입대작전’은 그야말로 극비리에 진행됐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 동생이 다 같이 살고 있었어요. 전쟁터에 간다고 하면 말릴 테니 가족에게 말도 하지 않고 입은 옷 그대로 대구역 집결지로 갔죠.”
대구역에 모인 류 회장과 100여 명은 트럭을 타고 경남 밀양에 있는 농장으로 출발했다. 그곳에서 보름 동안 도강훈련, 산악훈련, 사격훈련 등을 받았다. 군복도 없이 사복을 입고, 수저도 없이 부실한 식사로 끼니를 때울 땐 서러운 마음도 들었다고 한다. “중간에 ‘집에 갈 사람은 손들라’고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이미 자원했고, 싸워서 죽든지 살든지 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문산호’ 타고 작전지역으로 출발
772명의 병력은 9월 13일 부산에서 2700톤급 수송선 ‘문산호’에 몸을 실었다. 이름만 제1유격대대였을 뿐 이들은 고작 보름 정도 훈련받은 앳된 10대 학도병이었다. 다음 날 새벽 도착한 곳은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안이었다. 작전명 174. 장사상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학도병들의 첫 임무는 시작부터 고난에 부딪혔다. 배가 때아닌 폭풍에 휘말려 좌초됐고, 이를 발견한 적군은 학도병들을 향해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이때 많은 학도병이 성난 파도에 휩쓸려 육지를 밟지 못하고 전사했다.
“배에 있는 선원들이 육지로 동아줄을 던져 주더라고요. 수영하는 법도 몰랐지만 ‘상륙하라’고 하니 냅다 바다에 뛰어들었죠. 100명이 넘는 전우가 그대로 물에 빠져 죽었어요.”
총알을 피하다가 줄을 놓친 류 회장은 파도가 몸을 밀어준 덕에 운 좋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간신히 상륙한 곳은 적의 소굴이었다. 류 회장은 고사리손으로 모래사장을 파내 몸을 숨긴 뒤 적을 향해 총을 쐈다. 당시 참담했던 전투 상황을 회상하던 류 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10시간 만에 200고지 점령, 보급로 차단도
“바다에서 겨우 나오니까 총탄이 빗발치는데 당해 낼 사람이 없었지. 나중에 들어보니 북한군 부대는 2군단 5사단이라더군요. 그들은 훈련받은 군대지만, 우리는 무기도 제대로 못 갖춘 학생들이고…. 해변에서 전우들이 쓰러지는 와중에도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습니다. 지금도 그땔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렇게 전투는 계속됐고, 학도병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북한군이 우리 군 2개 연대가 포항에 상륙했다고 착각할 만큼 시선을 분산시켰다. 10시간 만에 200고지를 점령하고, 7번 국도 보급로를 차단하는 성과도 거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열세에 사흘째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학도병들을 태우러 온 ‘조치원호’ 승선까지 주어진 시간은 120분. 후퇴하는 학도병들을 사격하는 북한군에 유엔군이 반격하면서 해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배에 타지 못한 대원 50여 명이 아직 육지에서 대기 중이거나 줄을 잡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이 썰물로 바뀌자 더는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미군이 출항을 결정하면서 배 문을 닫아 버렸죠. 남은 이들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습니다. 우리가 참 비참한 전투를 한 겁니다.”
아군은 인천상륙작전 직후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해군 수송함을 보냈지만 대부분 전사하거나 실종돼 돌아올 수 없었다.
동해 ‘구국의 성지’로 자리매김 원해
장사상륙작전 당시 좌초된 ‘문산호’는 1997년 3월 6일 해병대가 발견했다. 정부는 2013년 장사상륙작전기념공원을 조성하고, 남정면 해수욕장에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위령탑’을 건립했다. 2019년 개봉한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도 학도병의 투혼이 재현됐다. 최근 서울시가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옥외 전광판에 방영 중인 참전용사 광고에도 류 회장이 출연한다.
장사상륙작전은 적에게 거짓정보를 흘리고 기만하기 위한 것이었다. 희생을 전제로 전쟁터에 몸을 던진 학도병들의 나라사랑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준다. 류 회장은 늦게라도 이들이 잊힌 영웅이 아님을 인정받아 가슴이 찡하다고 했다.
“1980년부터 전사한 동료를 위로하기 위해 9월 15일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처음엔 재정이 없어 애를 먹었는데, 나라에서 도와주는 만큼 규모를 키워 가려고 합니다.”
류 회장은 이러한 분위기를 이어가고자 고령에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그는 사업계획서와 설계도면을 보여 주며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광주를 ‘민주화 성지’라고 하잖아요. 나는 죽기 전에 동해를 ‘구국의 성지’로 만들고 싶습니다. 당시 동해지구에 있었던 13개 유격대를 상징하는 비석이 둘러싼 충혼탑을 세우고자 합니다. 9월 이전에는 국가보훈부 승낙을 받으려고 합니다.”
류 회장은 유엔군 참전용사들을 초청해 보은하는 ‘외교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전쟁을 딛고 몰라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유엔군의 도움이 큽니다. 말로만 ‘평화’를 외치는 건 아무 소용없어요. 잘 살게 됐다고 은혜를 잊으면 배은망덕이죠. 유엔군 참전용사들을 주기적으로 초청해 식사를 함께하고 포럼도 열고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소망을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지만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는 절대 작지 않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할 때마다 장사상륙작전도 함께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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