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군편소와 함께 하는 한미동맹 70년사

번역 중심 미군 교리 도입부터 독자적 체계 구축까지 서로의 교리·전술 이해…한미 ‘상호운용성’ 바탕 이룬다

입력 2023. 07. 07   17:59
업데이트 2023. 07. 0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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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편찬연구소와 함께하는 한미동맹 70년 여정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11 군사교육과 교리 발전

초창기 미군 군사교육체계·교리 영향
군사고문단 지도로 교육훈련 등 발전
1990년 이후 고유 교리체계 정립 노력
한미 상호교류 토대로 지속 발전 모색

 

『군사기본교리』. 출처=합동군사대학교 합동교리정보센터
『군사기본교리』. 출처=합동군사대학교 합동교리정보센터

 

1951년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의 FTC 훈련지도 모습. 출처=국사편찬위원회
1951년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의 FTC 훈련지도 모습.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창설 초기 국군의 군사교범. 출처=전쟁기념사업회
창설 초기 국군의 군사교범. 출처=전쟁기념사업회

 

1951년 도미 유학생 환송식 장면. 필자 제공
1951년 도미 유학생 환송식 장면. 필자 제공

 


타국과의 연합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자면 단연 ‘상호운용성’일 것이다. 원활한 지휘통신은 물론 서로의 무기체계·교리·전술 등을 이해해야만 완벽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한미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상호운용성을 갖추고 있다. 무려 70년이 넘게 철통같은 동맹을 유지하며 각종 연습·훈련·교육을 함께한 덕분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군은 세계 최강으로 불리는 미군의 군사교육체계와 교리에 영향을 받았고, 이를 발전시켜 독자적 체계를 구축했다. 다시 말해 군사교육과 교리 발전도 한미동맹을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우리 군에 어떠한 영향을 줬고, 또 동맹 발전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함께하는 한미동맹 70년 여정, 오늘은 군사교육과 교리 발전 측면에서 동맹의 역사를 살펴본다. 임채무 기자 


미군정 기간, 일본식 교육제도를 미국식으로

주한미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전부터 국군 창설을 위한 군 조직과 교육훈련 등을 지원했다. 특히 광복 이후 미군정 기간은 일제강점기의 일본식 교육제도를 미국식으로 전환하는 기회가 됐다. 미군은 국방경비대 창설 때부터 미국식 교육제도와 군사문화를 적용해 우리 군을 교육했다. 미국식 군사교육은 의사소통을 위한 영어교육에서 출발했다. 1945년 12월 미군정은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해 총 233명의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이들은 국방경비대와 해방병단 간부를 거쳐 건군의 주역이 됐다.


군사고문단, 교육훈련·전투지원 수행

미군정이 끝나고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 후에도 미군은 계속 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고문단(KMAG)을 발족시켜 국군의 군사교육을 지원했다. 관련 근거는 ‘한미 군사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과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었다.

군사고문단은 500명 규모였다. 이들은 군사원조 집행과 감독, 미군 무기 이양과 사용법 교육, 국군 편성과 훈련지원, 군사교육기관 정비·강화 등 광범위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국군이 군사고문단으로부터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받고, 군사교리를 습득하기에는 시간적인 한계가 있었다.

군사고문단은 6·25전쟁 기간 국군의 교육훈련뿐만 아니라 전투부대에 파견돼 전투지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2000명 규모로 확대됐다. 군사고문단은 야전 군단과 사단은 물론 대대급까지 배치되기도 했다. 또 6·25전쟁 중인 1950년 7월 27일 주한 공군 군사고문단과 1952년 2월 7일 주한 해군 군사고문단이 각각 창설돼 우리 해·공군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체계적 군사교육 위해 교육총감부 창설

군사고문단은 장교 교육체계를 정비하는 동시에 병사 충원과 부대 훈련에 깊이 관여했다. 1951년 1월 제주도 모슬포에 제1신병훈련소가 창설된 뒤 훈련소 운영과 신병 배출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전선의 추이와 미국의 국군 증강계획에 따라 신병훈련 기간 연장 및 인원을 조정했다는 것이다.

1951년 6월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 지시에 따라 군사고문단은 전투병과와 특기병의 신병 교육을 분리해 특기병 훈련을 강화함으로써 국군의 전문성을 한층 높였다. 또 기간병 재교육을 위해 야전훈련사령부(FTC)를 1951년 8월 4일 창설하고, 국군 부대의 전투 능력과 사기를 앙양시켰다.

군사고문단의 지원으로 국군 장병의 자질이 향상될 수 있었고, 지휘체계는 점차 공고화됐다.

국군은 군사고문단 협조를 받아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위해 1951년 8월 1일 부산에 교육총감부(교육총본부)를 창설하고,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소속의 정보훈련소를 제외한 모든 군사교육기관을 감독·통제했다. 이어 훈련효과 극대화를 위해 보병학교·포병훈련소·통신훈련소를 통합하고, 1952년 1월 6일 1만5000명 수용 규모의 육군훈련소(일명 상무대)를 설립했다.


장교 교육 틀 마련, 육사·육군대학 설립 추진

국군의 교육훈련체계도 단계적으로 정비·개선됐다. 밴 플리트 사령관 지시로 실무 차원에서 국군 교육훈련체계 정비작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던 군사고문단은 장교 교육의 틀을 마련해 4년제 육군사관학교(육사)와 육군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6·25전쟁으로 휴교했던 육사는 미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를 모델로 삼아 경남 진해에서 재개교했다. 1951년 10월 28일에는 고급장교의 재교육을 목표로 육군대학을 설립해 미 지휘참모대학과 같은 교과과정을 적용했다.

군사고문단은 1951년 전선이 고착되고, 정전회담이 진행되면서 군사교육체계·계획을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 일선에서 실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국군 교육훈련의 책임자였던 아서 챔페니는 국군 장교들을 미 군사학교에 유학시키고, 국내 군사학교에 군사고문단 수를 늘려 교육을 강화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1952년 6월 군사고문단은 1953명의 인원을 야전부대 참모부에 배치해 전투력 운용과 전투 수행을 지원하고, 교육총감부·육군훈련소·보병학교·포병학교 등 교육기관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등 국군의 초기 군사교육체계 정립을 지원했다. 또 각종 교보재와 미군 교리를 소개해 교리 발전에 일조했다.


미 군사학교 유학…국외 군사 위탁교육 시초

6·25전쟁은 미군 군사교리가 실전적으로 전투현장에서 적용된 전쟁이었다. 미 군사고문단은 고문관이라는 이름으로 각 부대에 파견돼 한국군의 군사작전을 지원했다. 특히 일부 전황이 긴박할 경우에는 작전을 직접 지원하기도 했다. 국군이 미군의 군사교리를 번역해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이를 실제 전투상황에 효과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이에 미 군사고문단은 국군의 군사교육에 더욱 관심을 갖고 지도·조언했다.

군사고문단은 국군 초급장교들이 미 보병학교·포병학교 등에 유학할 수 있도록 미 육군부에 요청해 승인받았다. 이것이 바로 국외 군사 위탁교육의 시초인 셈이다.

미 군사고문단은 20주의 특별 기본과정으로 조지아주의 보병학교에 150명, 오클라호마주의 포병학교에 100명 등 국군 장교들을 유학시켜 리더십을 갖춘 전문적인 장교단을 양성하고자 했다. 1951년부터 1953년 10월까지 계속된 국군의 도미 군사유학이 초등군사반 과정 초급장교를 중심으로 이뤄진 것은 기존 중견장교들이 이미 일본식 교육을 받아 미국식 사고방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데 많은 시간·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초급장교들은 미 보병학교에서 공용화기·전술학·참모학을, 미 포병학교에서 포술·측지·기상학 등을 교육받았다. 국군 초급장교들은 미 군사학교 교육제도를 단기간에 익히고, 한국의 군사교육기관에 배치돼 교관으로서 교육체계 정립에 기여했다. 무엇보다 교육을 이수한 국군 장교들은 전선에 투입돼 북한군, 중공군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국군의 전·사상자가 급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미 연합작전 능력 향상에 기여

전후 국군의 미 군사유학 기회·분야는 점차 확대돼 전 병과에 걸쳐 시행됐다. 군사유학을 경험한 장교는 1954년 1000명을 넘었고, 1973년까지 2만2144명에 달했다. 위관급 장교를 중심으로 한 미 전투병과학교 파견교육은 점차 영관급 장교를 대상으로 하는 고급교육과정으로 확대됐다. 다수의 국군 영관급 장교가 미 육·해·공군과 해병대 지휘참모대학 및 대학원, 국방대학교 산하 NWC(National War College)와 ES(Eisenhower School) 과정을 마쳤다. 그 수는 2022년까지 661명이다.

미 유학으로 군사지식을 습득한 장교들은 한미 연합작전 능력 향상에 기여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장교들은 귀국 후 병과학교나 각 군 대학에서 새로운 교리·전술, 작전술과 전략을 교육하면서 후진 양성에 헌신했다. 아울러 1970년대부터 미 군사교육을 수료한 장교 대부분은 한미연합야전군사령부(CFA), 한미연합군사령부(CFC), 미 7공군사령부 등에 근무하면서 미군 장교들과 함께 작전계획을 발전시키고 연합연습으로 연합작전 능력을 제고하고 있다.

미 군사유학 경험이 있는 고급장교는 대미업무를 관장하는 정책부서인 국방부와 합참, 각 군 본부에서 정책·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특히 한미동맹 협의체로서 1968년부터 개최된 한미안보협의회의(SCM)와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 이후 열리고 있는 한미군사위원회(MC)를 주관하는 부서에서 군사협력 활동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미군 장교, 국군 교육기관 수탁교육도 시행

국군의 미 군사유학뿐만 아니라 미군 장교의 국군 교육기관 수탁교육도 꾸준히 시행돼 군사교류 발전이라는 성과를 가져왔다. 미군 장교가 우리 군에서 수탁교육을 받은 것은 1972년 육군대학을 시작으로 점차 해군대학·공군대학으로 확대됐다. 2005년부터는 국방대에도 입교했다.

이들은 교육 기간 한국군 장교들에게 미군의 전술과 전략을 소개하고 유대를 강화했다. 졸업 후에도 한국 관련 부서에 보직돼 양국 군사관계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국군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미군의 수는 2022년을 기준으로 155명에 이른다.


미군 각종 군사교리·교범 번역

군사교리 발전 초기 국군은 미 군사고문단에서 제공한 군사교범과 군 내 일부 인사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입수한 일본군 군사교범을 참고해 학교교육·부대훈련을 위한 교재를 만들었다.

미군정은 일본식 군사교리를 대체해 미 군사교리를 적용하고자 미군의 야전교범(FM)을 훈련소와 각 부대에서 활용했다. 건국 이후 육군본부 작전교육국(교육과)은 교리 연구와 교범 편찬사업을 담당했는데, 우선적으로 미군의 각종 군사교리와 교범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1950년대 시작된 국군의 미 군사유학이 성공하면서 유학 장교들을 중심으로 미군의 군사교리를 보다 체계적으로 습득해 이를 국군에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미군의 군사교리는 군대 규모와 전쟁 수행 경험 등 다양한 측면에서 국군에 직접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국군은 미군의 군사교리를 번역·습득함과 동시에 국군의 특징에 부합하는 군사교리를 발전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베트남전쟁서 첫 독자적 군사교리 성립 성과

국군의 규모·작전환경에 적합한 전술 개발과 교리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결과 베트남전쟁에서 최초로 ‘중대전술기지’라는 국군의 독자적인 군사교리가 성립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는 그동안 미군 교리를 모방하는 것에서 탈피해 국군 특성을 반영하면서 예상되는 전장의 모습을 고려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파병 전까지만 해도 미군 군사교리에 100% 의존하던 국군이 독자적인 전술을 개발·적용함으로써 한 단계 도약한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가 발전시킨 군사교리가 효과적이라는 게 입증되자 대만에서 국군의 중대전술기지 개념과 야간 침투작전 군사교리를 습득하고자 하는 일도 생겼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국군은 미군의 혁신에 기반한 군사교리 발전을 반영해 독자적인 교리를 정립하고자 했다.


합동성 강조, 특색 있는 교리체계 구축

1990년 한국국방연구원(KIDA)에서 국군의 『군사기본교리』를 처음 연구했다. 이어 합동참모대학과 각 군 교육기관, 주요 간부들의 검토를 거쳐 1994년 12월 합동교범 0-1 『군사기본교리(초안)』가 발간됐다. 그리고 5차에 걸친 개정작업으로 2022년 8월 합동교범 0 『군사기본교리』를 재발간했다.

현재 국군은 합동성을 강조해 합참과 군별 특색 있고 연계된 교리체계를 구축·발전시키고 있다. 합참은 합동교리 연구 발전에 노력하고, 군사기본교리의 한 축으로서 합동기준 교범, 합동운용 교범, 합동참고 교범 등 합동교리체계를 갖추고 지속 발전시키고 있다.

합참과 각 군에서는 『군사기본교리』를 토대로 교범을 발간·운용하고 있다. 합참은 『군사기본교리』 외에 36종, 육군은 238종, 해군은 209종, 공군은 136종, 해병대는 44종이다.


다양한 수준별 교류·공유 노력

한미 간 교리 분야 발전은 상호교류를 토대로 확대되고 있다. 이를 실전적인 훈련에 접목해 점검하고 숙달시키는 노력도 꾸준히 시행되고 있다. 일례로 한미 양국의 육군교육사령부는 한미동맹 차원에서 연례회의 약정을 체결해 매년 9·10월 사이 개념·교리·변혁과 관련된 요소와 훈련계획을 공유 중이다.

한미 간 정책·전략·교리 등 다양한 수준별 교류와 공유 노력으로 국군의 독자적이고 적합한 교리를 발전시킴과 동시에 한미 상호운용성을 강화하고 연합작전 수행 능력을 향상하고 있다.

이처럼 국군은 초창기에 번역 중심의 미군 교리 도입기를 거치면서 기본적인 교리체계를 형성했고, 이후 국군 성격에 맞도록 변화시켰다. 특히 1990년대 이후부터는 국군 고유의 교리체계를 정립하고자 노력해 일정 수준의 독자적인 교리체계를 갖추게 됐다.

최정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 선임연구원
최정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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