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인 민족 없다’
현해탄 건너
자원입대
의용군 83명
장진호서
산화하고
포탄소리에
청력도 잃어
전우·가족
찾아주는 게
마지막 소원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 44.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장 박운욱 옹
중학교 3학년 때 일본 유학 중 전쟁 발발
징집영장 없는데도 귀국
인천상륙작전서 새벽 통신병 역할 수행
군번도 없이 스러진 전우
1·4후퇴 당시 피란민 행렬 잊지 못해
이제 남은 참전용사 회원 단 5명뿐
노구 이끌고 동지회 활동에 최선
죽는 날까지 전사자 유해 찾아
가족 품으로 돌려보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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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연합군의 갈등으로 빚어졌다. 당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많은 이스라엘 젊은이가 조국을 구하고자 자진입대해 전장으로 향했다. 6·25전쟁 때도 풍전등화 위기에 놓인 조국을 지키기 위해 외국에서 한국으로 향한 용감한 청년들이 있었다. 바로 재일학도의용군이다. 박운욱(95)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장이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마흔네 번째 주인공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글=배지열/사진=한재호 기자
전장에 피와 청춘을 바치다
재일학도의용군은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청년과 학생들이 스스로 일어나 조직했다. 자진해 직장과 학업을 중단한 1000여 명이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겠다고 나선 것.
고향인 부산에서 중학교 3학년 때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 박운욱 옹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타국에서 차별받으면서 살아가던 이들에게 ‘나라와 국가 없이는 민족도 없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던 것”이라며 “징집영장도 발부되지 않은 일본에서 그렇게 자기 몸을 던졌다”고 설명했다.
신체검사 등을 거쳐 최종 선발된 인원은 642명. 미8군 훈련소에 입소해 짧은 기간 훈련받은 이들 중 1진 78명을 전선에 보내기로 미군이 결정했다. 1950년 9월 8일 도쿄 스루가다이호텔에서 열린 출정식에 이어 이들이 향한 전장은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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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이들은 이후 동해안 원산 및 이원상륙작전과 갑산·혜산진 탈환작전에 투입됐다. 규슈지방 지원병 145명은 다른 의용군과 달리 미군이 아닌 국군에 배속돼 백마고지전투와 김화지구전투 등에 참전했다. 일부는 육군종합학교 간부후보생 22기로 입교해 지휘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박옹은 “우리 군의 모든 전선에서 활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같은 재일학도의용군이라도 전국 각지에 퍼져 만날 수가 없었다”고 부연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 땅을 다시 밟은 박옹은 당시 에드워드 앨먼드 미 육군중장이 이끌던 10군단사령부 군수지원부 연락병으로 배치받았다. “전차·비행기 기동과 폭격작전 내용을 전달하는 임무를 주로 수행했습니다. 새벽에도 연락이 자주 왔는데, 같이 숙소를 쓰던 장교들을 깨워 전화를 바꿔 줘야 했습니다. B-29 폭격기 위력이 대단했기 때문에 작전이 잘못되면 아군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부담감이 컸습니다.”
그렇게 북진하던 재일학도의용군에 장진호전투라는 비극이 닥쳤다. 박옹은 “전투를 앞두고 앨먼드 장군과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미 해병소장이 함께 모여 작전을 논의했다”며 “그러나 적의 거센 공격에 결국 움직이지 못하고 갇혀 버렸고, 안타깝게도 중공군 공세에 밀려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고 회상했다.
특히 이곳에서 재일학도의용군 83명이 산화했다. 그때까지 군번도 못 받고 최전선에서 미군과 함께 전투를 치르던 이들 대부분의 시신을 거두지 못해 실종 처리됐다. 이들은 1992년 11월 19일에 이르러서야 전사자로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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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흥남부두에서 이뤄진 1·4후퇴. 국군과 미군에 피란민까지 30만 명이 이동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박옹은 “교량이 다 망가지는 바람에 차로 이동하기 어려워 비행기로 가설 철교를 만들어 나르는 등 급박한 작전이 전개됐다”며 “남아 있는 국군 전력이 없는지 확인하라는 임무를 받고 흥남에서 함흥까지 헬기를 타고 오가기도 했다”는 기억을 털어놓았다.
박옹은 인터뷰 중 몇 번씩 기자의 질문을 되물었다. 전쟁 당시 받은 충격으로 청력이 좋지 않아서다.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그때 영향으로 지금도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해 재일학도의용군 모두 우리나라 곳곳에 피를 뿌리지 않은 곳이 없을 겁니다.”
“하루라도 빨리 가족 품으로 돌아가기를”
정식 편제가 아닌 재일학도의용군은 전쟁이 한풀 꺾이자 일본으로 복귀하는 이들이 있었다. 박옹도 1951년 일본으로 돌아가 중단했던 학업을 이어갔다. 그런 그에게 정전협정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당시 든 감정은 ‘허탈함’이었다고 한다. “모두가 피 흘리고 고생하면서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는데, 조국이 통일된 게 아니라 오히려 둘로 나뉘었다니. 지금 생각해도 그때 감정은 뭐라 다 표현하기 힘듭니다.”
박옹은 공부를 마치고 일본과 독일을 오가며 건축가로 일했다. 국내에서는 포항제철 설계에도 참여했고, 한양대에서 짧게나마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주로 외국에서 생활하던 박옹은 2019년 동지회장을 맡았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1951년 4월 부산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재일한교학도의용대’라는 이름에서 여러 차례 바뀐 끝에 1965년 10월 정부로부터 사단법인 설립 인가 허가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정부는 1967년 1월 참전자 642명 중 소재가 확인된 317명에게 보국포장을 수여했다. 1997년 45명, 2015년 4명을 추가 포상했다.
현재 재일학도의용군 노병들은 다양한 활동으로 나라사랑 정신을 전파하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조성된 재일학도의용군 묘역인 16묘역에서 매년 1월 1일과 현충일, 그리고 매달 1일 참배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또 매년 일선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에게 위문품을 전달하고, 전사자 유가족 격려 및 청소년 애국심 교육과 안보의식 고취 활동을 벌인다. 이제 실제 참전용사 회원은 5명밖에 남지 않아 앞으로는 유가족 위주로 활동을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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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에도 지금까지 노구(老軀)를 이끌고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다니며 동지회 활동에 힘쓰는 그의 소원은 하나다.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을 찾는 것. 2021년 9월 23일 미국 하와이에서 인계받아 한국으로 봉환한 68구의 전사자 유해가 있었다. 이 중 2구가 미 7사단 32연대 소속으로 밝혀졌다. 해당 부대는 장진호전투에 투입됐고, 다수의 의용군이 배속돼 있었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유해 중 전우들이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에 가족들과 함께 있다가 온 사람이 많아 국내 거주자 정보로는 가족을 찾기 힘든 상황입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재외동포청 등과 함께 일본에 있는 유가족의 유전자(DNA) 시료를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전우들을 하루빨리 찾는 게 저와 우리 동지회의 마지막 소원이자 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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