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독자마당

황석산성대첩

입력 2023. 06. 30   16:32
업데이트 2023. 06. 30   16:34
0 댓글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


중학교 1학년 때 황석산성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군 2만7000명이 조선 사람을 500여명이나 죽이고 코를 베어 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어느 날 지금까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에서는 조선 관군 1000명과 명나라군 3000명, 남원시민 6000명이 함께 일본군과 싸운 국제적인 전투를 치른 반면 황석산성전투는 외부 지원이 전혀 없는 순수한 백성의 전쟁이었다. 1555년 12월 2일 대학자 남명 조식 선생은 죽음을 각오하고 문정왕후와 명종을 비판하는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단성현감에 제수되었을 때 이를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를 올린 후 백성교육에 주력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안음현의 만석꾼 유명개가 거창좌수가 된 1577년부터 곳곳에 서당을 설립하고 사상을 전파했다. 신분사회에서 양반이 종들과 같이 밥도 먹고 일도 하고 말도 섞는 생활은 백성들에게는 황홀한 감동이었을 것이다.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유명개가 격문을 발하였고 열흘도 안 되는 기간에 전투를 하겠다고 모여든 백성이 수백 명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쩐(錢)의 전쟁’으로 직위의 상하를 막론하고 전장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코베기에 혈안이 된 전투를 치렀다. 코베기 보고서에 의하면 황석산성을 공격한 일본장수들이 벤 코는 4만700여개로 황석산성의 백성 7000명 보다 훨씬 많아 일본군이 일본군의 코를 베다가 스스로 무너진 코베기 대첩이었다.

황석산성의 서문을 공격한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산은 높고 성은 견고해 넘을 수도 없었고 뚫을 수도 없었다. 7만의 일본군은 황석산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라고 기록했다.

1597년 8월 14일부터 5일간의 황석산성대첩이 없었으면 우기타 히데이에가 전주성에서 양동북진작전을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9월 16일 이순신의 명량대첩도 있을 수 없었다. 육지와 바다에서 연속적인 패배에 스트레스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해 10월부터 고황병이 들어 이듬해 7월에 죽었다.

300년이 지난 1914년 3월1일 총독부가 안의군을 행정구역에서 없애버림으로써 황석산성대첩은 잃어버린 역사가 됐다. 말살된 인권과 자유를 백성들 스스로 지키려는 남명의 백성주도방위 전략은 일본의 침략에 황석산성을 피로 물들이고 조선을 살렸다. 서부경남 7개현 백성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열배도 넘는 7만의 일본군을 궤멸시켜 7년 임진전쟁을 종료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백성과 고통을 함께한 남명의 자유, 평등사상은 재조명돼야 할 것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