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43) 70여 년 만에 화랑무공훈장 받은 박춘강 옹

입력 2023. 06. 26   16:00
업데이트 2023. 08. 0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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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홀로 38선 넘어 자원입대
낡은 함정 정비하고 수많은 전투 치르며
전우들과 지켜낸 조국의 바다
이젠 후배가 철통같이 지켜주길…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 43. 70여 년 만에 화랑무공훈장 받은 박춘강 옹

박춘강 옹이 지난 19일 병원을 찾은 이상근(대령) 해군본부 인력근무차장으로부터 이종호 해군참모총장이 보낸 화환을 받으며 기뻐하고 있다.
박춘강 옹이 지난 19일 병원을 찾은 이상근(대령) 해군본부 인력근무차장으로부터 이종호 해군참모총장이 보낸 화환을 받으며 기뻐하고 있다.

 

후배 장병들과 경례하는 박춘강 옹.
후배 장병들과 경례하는 박춘강 옹.

 

70년 만에 주인에게 전달된 무성화랑무공훈장과 증서.
70년 만에 주인에게 전달된 무성화랑무공훈장과 증서.

 

박춘강 옹의 현역 시절 사진. 해군 제공
박춘강 옹의 현역 시절 사진. 해군 제공



6·25전쟁 참전용사 박춘강(89) 옹은 해군 전투함 묘향산함(PC-706)과 대동강함(PF-63) 승조원으로 활약했다. 최전선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워 무공훈장 수훈자로 결정됐지만 급박한 전장상황 탓에 훈장과 증서는 받지 못했다. 훈장은 70년이 흘러서야 주인을 찾았다. “이깟 훈장이 뭐라고….” 노병(老兵)은 대수롭지 않아 하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마흔세 번째 주인공으로 박옹을 만났다. 글=이원준/사진=양동욱 기자


‘3월 15일’ 입대일 절대 잊을 수 없어

비록 병상에 누워 있지만 박옹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전우들과 함께 불렀던 해군가 가사도 2절까지 또렷이 기억한다. 지난 17일 만난 박옹은 자신에게 해군은 삶의 긍지이자 자부심이라고 강조했다.

박옹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해군병으로 입대했다. 황해도가 본적인 그는 어렸을 적 홀로 38선을 넘어와 기숙학교를 다녔다. 전쟁이 발발하자 학교를 그만두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원입대했다.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으로 넘어왔지만 생활은 녹록지 않았어. 어린아이 혼자였으니 항상 배고팠고 힘들었지. 그때 해군 입대는 다시금 용기를 내는 계기가 됐어. 전쟁 중 바다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박옹은 다른 기억은 희미하지만 ‘3월 15일’ 입대일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교육훈련을 마친 그는 그해 6월 묘향산함(1963년 묘향함으로 개칭)에 배치돼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PC급은 우리 해군이 미군에서 획득한 전투함이다. 쓸 만한 군함 한 척 없던 초창기 해군에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대한해협해전 승전 주역인 백두산함(PC-701)이 대표적인 사례다. 3인치(76㎜)와 40㎜ 함포를 장착해 화력이 뛰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해전부터 상륙작전까지 수많은 작전에서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해군은 6·25전쟁 중 해상 전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여 1951년 10월 PC급 함정 2척을 추가 인수하고, 이듬해 5월 부산 해군기지에서 명명식을 했다. 그중 한 척이 묘향산함이었다.

박옹은 함정 명명식 직후 묘향산함 기관사로 부임했다. 노후 함정을 정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기관실에 주로 있으면서 정비를 담당했는데, 엔진이 아주 오래돼 제 성능을 유지하기가 무척 힘들었어. 하루라도 옷에 기름칠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 그때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전문지식도 없다 보니 몸으로 부딪혀 가며 배웠어.”


적 무장선박 격퇴·아군 구조 등 공적 세워

PC급 함정은 대체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미 해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량으로 건조한 PC급 함정을 민간에 매도하거나 대기상태로 놔뒀기 때문이다. 묘향산함도 마찬가지다. 1947년 임무가 해제된 후 5년간 예비함대에 있었다.

이로 인해 박옹을 비롯한 승조원들은 먹고 자는 시간만 빼고는 정비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부품이 중고여서 임무에 투입되고도 정비 소요가 많았다. 출항 전부터 정비를 담당하는 대원들은 긴장을 유지해야 했다.

“전투 중에도 언제 엔진 시동이 꺼질지 모르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지. 혹여라도 장비에 문제가 생겨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거나 우리 대원들이 다치면 큰일이었으니까. 기관실에서 엔진과 씨름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전투나 다름없었어.”

묘향산함은 한반도 전 해역을 누비며 많은 공적을 세웠다. 북한 마양도 근해를 경비할 때는 적 무장선박 10여 척과 교전해 막대한 피해를 줬다. 원산 근해에서는 북한군 장교 1명과 병사 5명을 포로로 잡기도 했다.

원산 근해에서 표류 중이던 선박에서 우리 해병대원을 구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박옹은 1953년 1월과 11월 두 차례 무성화랑무공훈장 수훈자로 결정됐다.

“우리 묘향산함은 한반도 근해에서 적 선박과 교전하거나 적의 주요 거점을 함포 사격으로 무력화하는 임무를 수행했어. 당시 우리 함은 해군의 자랑이었지.”


잊지 않고 찾아준 해군에 감사

박옹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몇 년간 해군에서 복무하다 하사로 전역했다. 자신이 무공훈장 수훈자란 사실은 최근 해군의 연락을 받고 알게 됐다.

해군은 국방부 조사단과 함께 이러한 분들의 무공훈장을 되찾아 드리는 사업을 지속해 오고 있다. 특히 2020년부터는 사업 추동력을 제고하고,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해군참모총장이 직접 참전용사·유가족에게 무공훈장을 전달하는 서훈식을 개최하고 있다.

박옹은 거동이 불편해 서훈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병실을 찾아온 이상근(대령) 해군본부 인력근무차장에게 훈장을 전달받았다.

“내가 잘해서 훈장을 받은 게 아니라 우리 함이 공적을 세운 거야. 전투현장에서 피 흘려 가며 싸웠던 대원들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훈장이 결정됐다는 것을 알았어도 일부러 찾지는 않았을 거야.”

가족들은 박옹이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 6·25전쟁 참전용사 국가유공자 신청도 하지 않았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20여 년 전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자고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해군 복무 자체가 나에게는 큰 혜택이었어. 젊은 시절 바다에서 함께했던 전우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 국가유공자가 되고 무공훈장을 받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어.”

박옹은 인터뷰를 마치며 과거 전우들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고 끝까지 자신을 찾아 준 해군 후배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내 젊은 시절 함께했던 전우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번 훈장을 받았다고 생각해. 또 해군 후배 장병들이 선배 전우를 아직 잊지 않고 먼 곳까지 와 줘 정말 고마워. 부디 대한민국의 바다를 철통같이 지켜주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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