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파란만장 커피사

오스만튀르크 대군 퇴각한 자리에 남은 건 ‘커피’

입력 2023. 06. 20   17:09
업데이트 2023. 06. 20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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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커피사 - 전쟁과 커피(상) 

1683년 비엔나전투 이후 유럽 확산
십자군 전쟁 때 전해졌다는 건 낭설
서구 열강, 커피 시장 가치에 눈뜨자
4000만 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사냥
전쟁보다 잔인했던 ‘식민지 재배’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전쟁은 전부 훔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일갈했다. 그러나 커피는 강자들이 설령 훔쳐 가더라도 독식할 수 없었다. 그들의 땅에서는 커피나무가 자랄 수 없던 탓이다. 기원전 10세기 시바 여왕, 에티오피아 왕국을 거쳐 기원후 7세기 이슬람의 등장과 1000년간 지속된 전성기 이후 17세기에 가서야 유럽 강국들은 비로소 커피의 가치에 눈을 떴다. 당시 서구 열강은 커피를 재배할 수 있는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앞다퉈 식민지를 개척했다. 이 과정에서 열강들 간의 전쟁은 숙명이었다. 커피 전파의 역사는 인류의 전쟁사와 수많은 장면에서 오버랩된다.


성경·신화 속의 전쟁과 커피

전쟁과 관련한 커피 스토리텔링은 성경과 전설의 시대에도 선명하게 전해진다. 예수의 족보를 따져 보면, 27대조(누가복음에선 42대조) 할아버지가 다윗이다. 다윗의 삶을 전하는 사무엘기 상권에 ‘볶은 곡물’이 나오는데, 독일 언어학자인 조지 파스치우스는 1700년 출간한 논문 ‘고대 이후의 새로운 발견’에서 “다윗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애비게일이 선물한 볶은 곡물은 커피일 수 있다”고 적었다. 사울에게 쫓기던 야인 시절의 다윗이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나발을 치러 갔을 때 받은 커피 선물은 결국 전쟁을 막았다.

에티오피아와 예멘에 걸쳐 있던 시바 왕국을 지배하던 여왕이 커피를 들고 솔로몬 왕을 알현한 사연은 우리네 단군신화처럼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다. 시바의 여왕은 유대교의 경전, 코란, 에티오피아 역사서에도 등장하는 인물. 1959년 율 브리너와 지나 롤로브리지다 주연의 영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이 개봉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이야기가 됐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솔로몬은 향료와 금은보화가 풍부한 시바를 점령하기 위해 출정 직전이었는데, 여왕의 커피 향에 이끌려 침실로 갔다.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는데, 훗날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에 오르는 메넬리크 1세다.

호메로스가 기원전 700년쯤 쓴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커피는 트로이전쟁 중에 ‘네펜테’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탈리아 언어학자 피에트르 델라 발레는 1650년 출간한 『중동여행기』에서 “트로이에서 살아 돌아온 헬레나 왕비를 축하하는 잔치에 포도주와 함께 제공된 네펜테는 커피였다”면서 “네펜테가 근심과 두려움을 잊게 했다”고 묘사했다. 커피는 전쟁 속에서 ‘마법의 묘약’인 양 대접을 받는다. 전사를 상징하는 스파르타의 군인도 커피를 애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국의 헨리 블런트 경은 “스파르타의 전사들이 먹은 블랙 수프가 커피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쟁 기록 속의 커피

기원전 2세기쯤 시바 왕국은 점차 예멘 지역의 힘야르 왕국과 에티오피아 왕국으로 나뉘게 된다. 유대교를 신봉하던 힘야르 왕국에서는 기원후 6세기 초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우호적인 야누프 왕이 등장했다. 그러나 유대교를 신봉하는 세력들의 반발로 기독교 박해가 벌어지자 기원후 525년 에티오피아가 힘야르를 공격하고 지배하게 되는데, 원정을 간 에티오피아 군인들에 의해 커피가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반도로 전해진 것으로 역사가들은 기록했다.

이어 610년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의 시대가 열리는데, 전장에서 그가 용감하게 싸우며 적을 물리친 힘은 커피에서 비롯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체로 “무함마드가 병들었을 때 가브리엘 천사가 검은색 음료를 주고 갔는데, 그것을 마시자 남자 40명을 말 안장에서 떨어뜨리고 40명 여인과 동침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식의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구전될 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언론인 출신으로 커피 역사를 기록한 윌리엄 우커스는 “관련 사료를 찾을 수 없다. 무함마드와 커피의 인연은 추측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커피가 다시 전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16세기에 들어서 오스만튀르크가 이집트와 예멘을 공격했을 때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200년에 걸쳐 벌어진 십자군 전쟁에서는 커피에 관한 언급조차 없다. “십자군 전쟁 때 커피가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주장은 현재로서는 근거가 없다.

이슬람 내부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탄압한 ‘커피 박해(Coffee Persecution)’가 1511년 메카와 1524년 카이로에서 각각 발생했다. 커피를 마시는 자리를 통해 지도층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저항의식을 키워가던 일각의 세력을 위정자들이 탄압했던 것이다. 그러나 커피 음용 금지 조치에 사람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핵심 지도층은 해당 지역 관료들을 파면하는 것으로 민심을 수습했다. 그 결과 커피를 되레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전장의 필수품이 되다

커피가 전쟁을 치르는 데 필수품이라는 사실은 1683년 비엔나전투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스만튀르크 30만 대군이 합스부르크의 수도, 빈을 포위했다가 그리스도교 연합군이 가세하자 급하게 퇴각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군인에게 보급하는 커피 생두를 산더미처럼 쌓아 둔 채 도망쳤다. 유럽연합군은 이를 튀르크 군이 끌고 온 코끼리의 먹이인 줄 알았는데, 곧 그 쓰임을 알게 됐다.

커피의 각성효과가 군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밤잠을 쫓아준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전쟁을 치를 때 요긴한 정보였다. 이 전쟁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에 ‘블루보틀’이라는 카페가 문을 열게 됐다. 마침내 유럽에 커피 음용 문화가 싹트게 된 것이다.

커피가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각국은 커피가 큰 돈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네덜란드가 1658년 실론에 커피나무를 옮겨 심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와 영국, 독일 등 유럽 강국들은 경쟁적으로 식민지에 커피를 재배했다.

1680년부터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커피를 재배한 네덜란드는 1712년 처음으로 커피 400㎏가량을 자국으로 들여왔다. 아라비아 상인을 통하지 않고 자급자족한 이른바 ‘식민지 커피’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에서 커피 묘목을 받아 1723년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섬에서 재배를 시작했다. 여기서 자란 나무가 브라질로 옮겨지고 연이어 퍼져 나가면서 사실상 아메리카 대륙에서 커피의 원조가 됐다.

유럽이 커피를 재배하는 과정은 전쟁보다 잔인했다. 식민지에서 커피 농사를 짓기 위한 인력으로 아프리카 노예사냥을 했다. 16~19세기 노예선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농장으로 끌려간 흑인은 4000만 명에 달했다.

커피를 자급하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여러 해프닝이 벌어졌다. 1763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 마당에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커피는 눈엣가시였다.

커피로 인해 무역적자가 심화하자, 프리드리히는 국가만이 커피를 수입하고 왕이 지정한 곳에서만 커피를 볶게 했다. ‘냄새로 커피를 찾아내는 사람’이라는 뜻의 ‘커피리처’라는 단속반까지 만들어 허가 없이 볶는 것을 코의 감각으로 찾게 했다. 이 사연은 유럽에서 벌어진 ‘커피 박해’로 기록됐다.

 
필자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은 충북대 미생물학과, 고려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 영어영문과 언어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커피인문학』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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