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 사수 위해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
포탄이 하늘 뒤덮는 생사 갈림길
그래도 최종 승자는 우리였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 42. 6·25참전유공자회 오달면 광주광역시지부장
17세 평범한 중학생에서 소년병으로
포병 특기 받고 9사단 6포대에 배속
1951년 11월 백마고지 전선에 투입
전우 쓰러져 가는 모습에 공포 몰려와
참혹한 기억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아
지금도 비처럼 내리는 포탄 눈앞에 선해
열흘간 중공군의 파상 공세 막아내
낮에는 점령 밤에는 빼앗기길 반복
12차례 공방전 끝 마침내 고지 사수
강력한 군사력이 비극 막을 수 있어
힘닿는 데까지 전쟁의 참상·교훈 알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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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 10일 첫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6·25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남북은 협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고자 고지쟁탈전을 벌였다. 1952년 10월 전개된 백마고지전투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국군9사단은 중공군 38군의 맹렬한 공격을 열흘간 막아 내 고지를 사수했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마흔두 번째 주인공은 17세 ‘소년병’으로 입대해 백마고지 사수에 힘을 보탠 오달면 6·25참전유공자회 광주광역시지부장이다. 글·사진=김해령 기자
전략적 이점 가진 백마고지
“전우들이 비장한 표정과 패기 있는 목소리로 군가를 부르며 백마고지로 향했어요. 그리고 저녁이면 그중 일부는 시체로 돌아왔죠. 백마고지 정상은 매일 전투가 끝날 때마다 1m씩 깎여 나갈 정도였어요.”
오 지부장은 백마고지전투에서 매일 목격했던 참혹한 기억을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다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도 대낮에 포탄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이 눈앞에 선하다고 한다. 그는 “목숨을 걸고 동고동락하던 전우들이 참호에서 쓰러져 가는 모습을 보며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다”며 “우리는 백마고지를 사수하겠다는 하나의 목표로 밤낮없이 치열하게 싸웠다”고 회상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공세로 문을 열어 15일까지 펼쳐졌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백마고지에서의 군사적 접촉은 그보다 1년 3개월 전인 1951년 7월부터 시작됐다. 휴전협상에 돌입할 무렵이다.
중공군이 백마고지를 노린 이유는 전략적 이점 때문이었다. 강원도 철원 서북방 효성산 남쪽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백마고지를 차지하면 남동쪽으로 펼쳐진 철원평야를 훤히 내다볼 수 있어서다. 아군으로선 이곳을 빼앗길 경우 중부지역에 배치된 아군 병참선인 ‘3번 도로’ 등 많은 보급로를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었다. 아군, 적군 모두 백마고지 탈환에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열일곱에 입대해 치열한 고지쟁탈전 참전
오 지부장이 백마고지로 향한 것은 1951년 11월이다. 10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서울 숭문중학교 3학년이던 오 지부장은 학업을 중단하고 9사단에 합류, 같은 해 2월 5일 군번을 받고 참전했다. 포병 특기를 받은 그는 경남 진해에서 약 1개월간 포병 훈련을 받고 9사단 6포대에 배속돼 포천으로 향했다. 이어 1951년 11월경 백마고지 사수 명령을 받고 전선에 투입됐다.
9사단은 본격적인 백마고지전투가 벌어지기 1년 전인 10월 17일부터 철원지역 주저항선을 기점으로 좌로는 백마고지, 우로는 중강리까지 11㎞의 철원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오 지부장이 소속된 6포대 역시 이 임무를 맡았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에 파상 공세를 가해 왔다.
오 지부장은 당시 부는 바람과 날씨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바람이 가볍게 불고 가끔씩 흐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청명한 날씨였다”며 “오전 8시쯤 적 포병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곧바로 보병이 공격해 올 거라고 예상했으나 한동안 조용하더니 2시간쯤 지났을 때 연막탄을, 또 2시간 지났을 때는 포를 쐈다”고 떠올렸다.
그는 오전엔 적이 소구경 박격포 위주로 사격하다가 오후부터는 122㎜ 야포와 120㎜ 박격포 등을 발사했다고 말했다. 오 지부장은 “오후 3시부터는 아군 진지 전방 장애물 지대부터 교통호까지 거의 한 군데도 빠짐없이 포를 퍼부었다”며 “우리 군도 포문을 열어 반격했다”고 설명했다.
오 지부장은 백마고지전투 때 사격지휘소(FDC)에서 사격제원을 계산해 포반장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때는 사격제원 계산 연습을 계속했다. 정확한 사격제원이 직접 싸우는 전우들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오 지부장은 “적군 포가 진지 중간에 자주 떨어졌다”며 “지하에 토굴을 파놓고 생활한 덕에 겨우 살아난 적이 수십 번”이라고 부연했다.
백마고지전투는 이후 열흘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이 전개됐고, 10월 15일 마침내 아군이 백마고지를 점령했다. 하지만 백마고지는 아군과 적군의 엄청난 포격에 황폐화됐다. 오 지부장은 “백마고지는 종일 쏘아대는 포탄이 하늘을 뒤덮는 등 날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며 “낮에는 점령하고, 밤에는 빼앗기길 반복했다. 그래도 최종 승자는 우리였다”고 덧붙였다.
“튼튼한 군사력으로 국민 보호”
오 지부장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백마고지에서 군 생활을 했다. 정전협정 이후에는 경기도 연천 고랑포에 주둔하며 군 생활을 이어가다 1954년 2월 5일 하사로 전역했다. 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오 지부장은 거리 퍼레이드에서 시민들에게 큰 박수를 받아 뿌듯했다며 미소 지었다.
65세에 직장을 퇴직한 그는 6·25참전유공자회 광주광역시지부에 가입해 6·25전쟁 바로 알리기 활동에 몰두해 왔다. 2020년 지부장 취임 이후에는 지역 중·고등학교 학생 안보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오 지부장은 튼튼한 군사력만이 전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이 비극을 막을 수 있다. 힘닿는 데까지 6·25전쟁의 참상과 교훈을 널리 알리도록 하겠다”고 역설했다. 그의 결연한 의지는 목에 걸린 호국영웅장 메달보다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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