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대만 ② 가오슝 군관학교 담장에 각종 홍보문구 게시 우수학생 취업 잘되는 일반대학으로 해군박물관 안내는 해사 생도가 맡아 돔형 공군체험전시관 웅장한 모습 타이베이서 고속열차로 2시간30분 먹거리·생필품 파는 야시장 가볼 만
가오슝의 대만 육군군관학교 담장에 게시된, 생도 모집을 알리는 홍보사진.
가오슝 외곽에 위치한 공군군관학교 정문 전경.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한·중 수교협정’을 체결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한 한국은 대만(중화민국)과는 단교했다. 새로운 친구(중국)를 맞이한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옛 친구(대만)는 서서히 잊혀 갔다. 발전하는 한·중 관계의 뒤안길에서 한국의 신세대는 ‘타이완(대만)’과 ‘타이(태국)’를 혼동하기에 이르렀다. 한국과 대만, 두 나라 관계는 애증이 교차한다.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대륙을 방황하던 시절, 장제스 총통은 임시정부의 처음이자 유일한 후원자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에도 대만은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한국을 승인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양국은 반공 전선의 보루로 혈맹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타이베이 중앙역에서 대만의 남부 항구도시 가오슝까지는 352㎞이다. 한국의 부산과 같은 제2의 도시까지는 고속철은 2시간30분, 일반 열차는 4시간30분이 걸린다. 한국·대만·싱가포르·홍콩은 한때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불렸다. 하지만, 2006년을 기점으로 한국은 연 국민 개인소득에서 대만을 추월했고, 각종 경제지표에서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형과 동생의 살림살이가 역전된 것이다. 해안선을 끼고 가오슝으로 달리는 열차의 바깥 지형은 의외로 평탄하다. 280만 인구를 가진 가오슝은 대만 최대의 무역항이다. 또한, 육·해·공군 군관(사관)학교를 포함한 군사교육 기관이 모여 있는 도시이다.
신세대 관심서 멀어지는 대만의 군관학교
가오슝의 육군군관학교까지는 지하철역에서도 20여 분을 걸어야만 했다. 이윽고 철조망이 올려진 긴 담장에 생도 모집을 위한 홍보용 대형 사진들이 보였다. 4년 학비 지원, 수당 지급, 미 육사 유학, 조국을 위한 헌신 등 지원자들을 위한 다양한 혜택이 나열돼 있다. 영내 견학은 코로나19로 일시적으로 중단됐지만, 정문 옆 면회실에서 당직 장교가 대신 학교를 소개한다.
1924년 5월 1일, 광저우에서 황포군관학교가 창설됐다. 국공내전이 벌어지자, 1946년 6월 16일 이곳 가오슝으로 학교가 이전해 왔다. 내년 창설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학교는 신입생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우수 고교생들이 군관학교보다는 다양한 장학금과 졸업과 동시 높은 급여의 직장이 보장되는 일반 대학으로 몰린단다. 모병제인 대만에서 기꺼이 자신의 청춘을 국가를 위해 바치겠다는 신세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광대한 캠퍼스 울타리의 초병들은 대부분 비무장 여군이다. 마침 학교 행사를 위한 후문의 대형 풍선 아치가 강풍에 쓰러졌다. 2명의 여군 초병이 사력을 다해 세우려고 했으나 힘에 부친다. 얼른 달려가 같이 밧줄을 당겨 겨우 풍선 아치를 세웠다. 감사를 표하는 여군들이 해·공군 군관학교 위치를 메모지에 그려가며 상세하게 필자에게 알려줬다.
해군박물관 안내를 하는 해군군관학교 남녀 생도.
장제스 도서관의 100년 해군 역사
가오슝의 항만시설과 가까운 곳에 해군군관학교와 해군박물관이 있었다. 군인 휴양시설 내의 군사박물관은 ‘중정도서관(中正圖書館)’으로 명명돼 있었다. 작은 규모의 2층 전시실을 가졌지만, 100년의 해군·해병대 역사를 간직한 자료들이 많았다. 안내는 주말 자원봉사를 나온 해사 3학년 남생도 ‘황(黃)’과 여생도 ‘송(宋)’이 맡고 있었다. 한류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송’ 생도는 만약 기회가 있다면, 한국 청년과 사귀고 싶다며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수백 년 전부터 군항으로 개발됐던 가오슝은 태평양전쟁 시에는 일본 해군의 발진기지였고, 미군 폭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12년에 창설된 해병대(육전대) 전시실에서 강조하는 ‘충성·명예·애민·전우애’의 가치관은 한국 해병대의 덕목과 일치한다. 과거 본토 수복의 선봉으로 내세웠던 대만 해병대는 1개 사단, 2개 여단 규모의 2만여 명에 달했으나, 현재는 절반 병력으로 축소됐다. 해군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해군군관학교는 코로나19로 외부인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게시판에서는 군관학교의 다양한 군 간부 양성과정을 소개하고 있었다.
진먼도 공중전에서 최초의 공대공 미사일을 사용한 대만 공군 F-86 전투기 모습.
최초의 공대공 미사일과 진먼도 공중전
가오슝 외곽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공군기술학교·군수부대 구역을 지나 한참을 가니, 막다른 도로 끝에 공군군관학교 정문이 있었다. 구글 지도에 표기된 정문 옆의 공군박물관은 폐쇄됐단다. 박물관 입구는 잠겨 있었고, 공터에 수송기 몇 대만 덩그렇게 전시돼 있다.
위병소 근처에서 공군소령을 만나 헛걸음의 아쉬움을 이야기하니, 박물관은 최근 ‘공군체험전시관’에 통합됐단다. 그 장교는 호출택시를 불러 운전기사에게 자세하게 목적지를 알려준다. 지붕이 있는 운동장 형태의 체험전시관은 웅장했다.
1920년에 창설된 대만 공군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시 대부분 미군 항공기로 전쟁을 치렀다. 장구한 공군 역사를 시대순으로 전시된 항공전의 영웅 소개와 모형항공기 진열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1958년 9월 24일, 중국 본토와 4㎞ 떨어진 진먼도 공중전에서 최초로 공대공 미사일이 사용됐다.
중국은 지상 포격전을 일거에 타개하고자, MIG-17기 100대를 출격시켰다. 이에 대만의 F-86 전투기 32대가 긴급 발진했다. 중국은 전투기 성능과 수적 우위로 자신만만했지만, F-86은 미국제 AIM-9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하고 있었다. MIG기 조종사들은 6·25전쟁에서 이미 실전 경험을 가졌지만, 항공기에는 오직 3문의 기관포만 장착돼 있었다. 미사일과 기관포 대결로 3대의 F-86이 추락했지만, 20대의 MIG기가 격추됐다. 미사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대패한 중국은 두 번 다시 대만해협에 공군기를 출격시키지 못했다. 신무기가 공중전 개념을 바꾼 대표적인 사례다.
많은 인파로 붐비는 가오슝의 야시장 전경.
대만 음식문화와 가오슝의 야시장
가오슝의 야시장은 낮의 더운 날씨를 피해 나온 시민들로 인산인해다. 아열대 기후대에 있는 대만 전역은 먹거리가 풍부하다. 쌀농사도 1년 2모작이 가능하고, 망고·바나나 등 열대 과일도 풍성하다.
대만은 기본적으로 ‘이민자의 나라’다. 중국 각지에서 삶의 터전을 옮겨온 사람들은 ‘고향의 맛’을 이 섬에 퍼뜨렸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온 본토인들은 중국 전역의 사람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로 인해 대만의 식탁은 더욱 다양해졌다.
야시장에는 길거리 음식 이외에 다양한 생필품 판매대도 펼쳐져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임시 놀이시설까지 있는 야시장은 한국 시골의 5일장 분위기와 비슷했다. 내일은 대만해협을 건너 ‘진먼도 전쟁유적지’를 답사하기로 계획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대만 ② 가오슝 군관학교 담장에 각종 홍보문구 게시 우수학생 취업 잘되는 일반대학으로 해군박물관 안내는 해사 생도가 맡아 돔형 공군체험전시관 웅장한 모습 타이베이서 고속열차로 2시간30분 먹거리·생필품 파는 야시장 가볼 만
가오슝의 대만 육군군관학교 담장에 게시된, 생도 모집을 알리는 홍보사진.
가오슝 외곽에 위치한 공군군관학교 정문 전경.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한·중 수교협정’을 체결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한 한국은 대만(중화민국)과는 단교했다. 새로운 친구(중국)를 맞이한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옛 친구(대만)는 서서히 잊혀 갔다. 발전하는 한·중 관계의 뒤안길에서 한국의 신세대는 ‘타이완(대만)’과 ‘타이(태국)’를 혼동하기에 이르렀다. 한국과 대만, 두 나라 관계는 애증이 교차한다.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대륙을 방황하던 시절, 장제스 총통은 임시정부의 처음이자 유일한 후원자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에도 대만은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한국을 승인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양국은 반공 전선의 보루로 혈맹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타이베이 중앙역에서 대만의 남부 항구도시 가오슝까지는 352㎞이다. 한국의 부산과 같은 제2의 도시까지는 고속철은 2시간30분, 일반 열차는 4시간30분이 걸린다. 한국·대만·싱가포르·홍콩은 한때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불렸다. 하지만, 2006년을 기점으로 한국은 연 국민 개인소득에서 대만을 추월했고, 각종 경제지표에서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형과 동생의 살림살이가 역전된 것이다. 해안선을 끼고 가오슝으로 달리는 열차의 바깥 지형은 의외로 평탄하다. 280만 인구를 가진 가오슝은 대만 최대의 무역항이다. 또한, 육·해·공군 군관(사관)학교를 포함한 군사교육 기관이 모여 있는 도시이다.
신세대 관심서 멀어지는 대만의 군관학교
가오슝의 육군군관학교까지는 지하철역에서도 20여 분을 걸어야만 했다. 이윽고 철조망이 올려진 긴 담장에 생도 모집을 위한 홍보용 대형 사진들이 보였다. 4년 학비 지원, 수당 지급, 미 육사 유학, 조국을 위한 헌신 등 지원자들을 위한 다양한 혜택이 나열돼 있다. 영내 견학은 코로나19로 일시적으로 중단됐지만, 정문 옆 면회실에서 당직 장교가 대신 학교를 소개한다.
1924년 5월 1일, 광저우에서 황포군관학교가 창설됐다. 국공내전이 벌어지자, 1946년 6월 16일 이곳 가오슝으로 학교가 이전해 왔다. 내년 창설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학교는 신입생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우수 고교생들이 군관학교보다는 다양한 장학금과 졸업과 동시 높은 급여의 직장이 보장되는 일반 대학으로 몰린단다. 모병제인 대만에서 기꺼이 자신의 청춘을 국가를 위해 바치겠다는 신세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광대한 캠퍼스 울타리의 초병들은 대부분 비무장 여군이다. 마침 학교 행사를 위한 후문의 대형 풍선 아치가 강풍에 쓰러졌다. 2명의 여군 초병이 사력을 다해 세우려고 했으나 힘에 부친다. 얼른 달려가 같이 밧줄을 당겨 겨우 풍선 아치를 세웠다. 감사를 표하는 여군들이 해·공군 군관학교 위치를 메모지에 그려가며 상세하게 필자에게 알려줬다.
해군박물관 안내를 하는 해군군관학교 남녀 생도.
장제스 도서관의 100년 해군 역사
가오슝의 항만시설과 가까운 곳에 해군군관학교와 해군박물관이 있었다. 군인 휴양시설 내의 군사박물관은 ‘중정도서관(中正圖書館)’으로 명명돼 있었다. 작은 규모의 2층 전시실을 가졌지만, 100년의 해군·해병대 역사를 간직한 자료들이 많았다. 안내는 주말 자원봉사를 나온 해사 3학년 남생도 ‘황(黃)’과 여생도 ‘송(宋)’이 맡고 있었다. 한류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송’ 생도는 만약 기회가 있다면, 한국 청년과 사귀고 싶다며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수백 년 전부터 군항으로 개발됐던 가오슝은 태평양전쟁 시에는 일본 해군의 발진기지였고, 미군 폭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12년에 창설된 해병대(육전대) 전시실에서 강조하는 ‘충성·명예·애민·전우애’의 가치관은 한국 해병대의 덕목과 일치한다. 과거 본토 수복의 선봉으로 내세웠던 대만 해병대는 1개 사단, 2개 여단 규모의 2만여 명에 달했으나, 현재는 절반 병력으로 축소됐다. 해군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해군군관학교는 코로나19로 외부인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게시판에서는 군관학교의 다양한 군 간부 양성과정을 소개하고 있었다.
진먼도 공중전에서 최초의 공대공 미사일을 사용한 대만 공군 F-86 전투기 모습.
최초의 공대공 미사일과 진먼도 공중전
가오슝 외곽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공군기술학교·군수부대 구역을 지나 한참을 가니, 막다른 도로 끝에 공군군관학교 정문이 있었다. 구글 지도에 표기된 정문 옆의 공군박물관은 폐쇄됐단다. 박물관 입구는 잠겨 있었고, 공터에 수송기 몇 대만 덩그렇게 전시돼 있다.
위병소 근처에서 공군소령을 만나 헛걸음의 아쉬움을 이야기하니, 박물관은 최근 ‘공군체험전시관’에 통합됐단다. 그 장교는 호출택시를 불러 운전기사에게 자세하게 목적지를 알려준다. 지붕이 있는 운동장 형태의 체험전시관은 웅장했다.
1920년에 창설된 대만 공군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시 대부분 미군 항공기로 전쟁을 치렀다. 장구한 공군 역사를 시대순으로 전시된 항공전의 영웅 소개와 모형항공기 진열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1958년 9월 24일, 중국 본토와 4㎞ 떨어진 진먼도 공중전에서 최초로 공대공 미사일이 사용됐다.
중국은 지상 포격전을 일거에 타개하고자, MIG-17기 100대를 출격시켰다. 이에 대만의 F-86 전투기 32대가 긴급 발진했다. 중국은 전투기 성능과 수적 우위로 자신만만했지만, F-86은 미국제 AIM-9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하고 있었다. MIG기 조종사들은 6·25전쟁에서 이미 실전 경험을 가졌지만, 항공기에는 오직 3문의 기관포만 장착돼 있었다. 미사일과 기관포 대결로 3대의 F-86이 추락했지만, 20대의 MIG기가 격추됐다. 미사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대패한 중국은 두 번 다시 대만해협에 공군기를 출격시키지 못했다. 신무기가 공중전 개념을 바꾼 대표적인 사례다.
많은 인파로 붐비는 가오슝의 야시장 전경.
대만 음식문화와 가오슝의 야시장
가오슝의 야시장은 낮의 더운 날씨를 피해 나온 시민들로 인산인해다. 아열대 기후대에 있는 대만 전역은 먹거리가 풍부하다. 쌀농사도 1년 2모작이 가능하고, 망고·바나나 등 열대 과일도 풍성하다.
대만은 기본적으로 ‘이민자의 나라’다. 중국 각지에서 삶의 터전을 옮겨온 사람들은 ‘고향의 맛’을 이 섬에 퍼뜨렸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온 본토인들은 중국 전역의 사람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로 인해 대만의 식탁은 더욱 다양해졌다.
야시장에는 길거리 음식 이외에 다양한 생필품 판매대도 펼쳐져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임시 놀이시설까지 있는 야시장은 한국 시골의 5일장 분위기와 비슷했다. 내일은 대만해협을 건너 ‘진먼도 전쟁유적지’를 답사하기로 계획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