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41. 국군2사단 공병대 참전 강태흔 옹
공포로 가득했던 전장서 물자 보급 임무 수행
무서웠지만 책임감으로 감당해 내
전쟁의 커다란 비극 후세가 겪지 않았으면…
|
공병은 적의 기동로를 차단하고, 아군의 원활한 이동을 보장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공병은 전투병과와 비교해 전면전에 투입되는 상황이 적을 것이라는 인식이 많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국군2사단 공병대로 6·25전쟁에 참전한 강태흔(89) 옹을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마흔한 번째 주인공으로 소개한다.
글=배지열/사진=이경원 기자
중공군 ‘인해전술’에 아군·적군 구분 안 돼
강옹은 1951년 10월 고향인 충북 청주에서 소집돼 군문에 들어섰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라 가족도 그의 참전을 걱정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강옹은 “다들 ‘죽으러 간다’고 말리셨지만 형님 두 분을 대신해 내가 입대해야 했다”며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살아서 가족을 다시 만나니 꿈만 같았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제주도 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그는 경남 김해에 있는 공병학교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지뢰 매설, 교량 폭파 등을 교육받았다.
“다리 폭파에 폭약(TNT)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지도상으로 멀리 있는 특정 지점까지의 거리를 컴퍼스로 측정하는 법 등을 배웠는데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3개월간 교육받고 전방으로 향했죠.”
국군2사단 공병대에 배치받은 강옹. 그는 지금도 오성산에서 전개된 김화지구전투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오성산은 당시 북한이 우리 국군장교 한 트럭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할 만큼 전략적 요충지다. “공병 물자를 보급하러 트럭으로 이동하는데, 적 포탄이 여기저기서 떨어졌습니다. 운전병이 무서워서 ‘가지 말자’라고까지 했죠. ‘그래도 우리 책임이 있으니까 가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곳에서 맞닥뜨린 상황은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고지를 공략해 오던 때였다.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새까맣게 밀려오는데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예광탄이 빨갛게 불빛을 내면서 날아가자 기관포도 불을 뿜었습니다. 주변의 풀과 나무가 완전히 초토화돼 산이 평지가 될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리 포탄을 쏴도 계속 왔어요. 그만큼 인해전술이 무서웠죠.”
국군9사단과 2사단이 교대하면서 치른 백마고지전투도 생생하다. 강옹은 “하룻밤 새 부대원의 3분의 2가 죽거나 다치는 상황이 반복됐다”며 “심지어 배치받은 신병이 밥도 한 끼 제대로 못 먹고 전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급박한 전황 탓에 입영 장정들이 사격하는 법만 익히고, 입소한 지 일주일 만에 실전에 투입되는 상황이었다. 강옹의 표현을 빌리자면 ‘빨리 가면 빨리 갔다고, 천천히 가면 천천히 가는 바람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운명에 처한 국군장병들이었다.
정전 후 1956년 하사로 전역
|
|
강옹은 복무 기간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부대별로 필요한 공병 물자를 신속하게 파악해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는 “약 50개 부대가 참여한 지휘소연습(CPX)에서 우리 공병대가 1등을 차지해 칭찬을 들었다”며 “특정 상황을 주고 그걸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재료 목록을 작성해 제출하는 방식이었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지뢰매설작업. 강옹의 머릿속에는 작업 순서가 또렷이 남아 있다. 그는 펜을 집어 들고 종이에 도형을 그려 가면서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지뢰를 여기에 하나 묻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지점을 기준으로 가로로 철사를 길게 연결해 그에 맞춰 매설작업을 합니다. 그 줄 앞뒤로 이중 삼중의 지뢰밭을 만들어 적이 못 빠져나가게 합니다. 아군 진지와 적군 진지 중간에서 그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전장에서의 하루하루는 삶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시간이었다. 강옹은 “배고픔이나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고, 저녁이 되면 ‘오늘 하루도 살았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며 “밥을 먹다가도 포탄이 떨어져 사람이 죽는 걸 보면 그저 ‘내가 이 시간에 살아 있구나’에 감사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강옹도 크게 다친 경험이 있다. “1953년 한 전투에서 물자를 싣고 가다가 타이어에 펑크가 나면서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졌습니다. 한 시간쯤 혼수상태로 있었을까. ‘아이고’ 소리를 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마침 도착한 구조대가 저를 발견해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경기도 포천에 있던 이동외과병원으로 옮겨진 강옹은 나중에 경주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돼 5개월가량 치료받았다. 그가 내민 병상일지에서도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방에서 임무 수행이 어려워진 강옹은 1101야전공병단에 배치돼 주로 도로 보수작업에 투입됐다. 그는 후에 26보병사단으로 전출됐고, 1956년 하사로 전역했다.
국방·안보 분야 빈틈없이 대비해 둬야
강옹에게 전쟁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끈질긴 운명이었다. “1953년 7월 강원도 강릉에 있었는데 정전을 앞두고 물자를 얼마나 실어 날랐는지 모릅니다. 거의 24시간 내내 차량을 운행해야 했죠. 나중에는 얼마나 차가 오갔는지 단단하던 비포장도로가 푸석해질 정도였습니다.”
열악한 상황에서 차량으로 전장을 누비는 임무를 수행한 그가 깨달은 교훈도 있다. 강옹은 “추운 겨울에 차를 고치려고 애쓰는 운전병을 보면서 ‘나중에 전역해도 운전은 안 해야지’ 싶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사가 오가던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고요함이 찾아왔다. 1953년 7월 27일 정전을 맞은 것. 그로부터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현역 장병과 젊은 세대에게는 전쟁보다 평화가 익숙하다. 강옹은 이러한 시간이 이어지려면 강력한 국방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저는 적이 새까맣게 쳐들어오는 걸 직접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전쟁으로 우리나라가 얼마나 큰 비극을 겪었는지도 경험했죠. 우리의 힘을 기르고, 국방·안보 분야에서 적의 공격을 막을 준비를 빈틈없이 해 둬야 합니다. 그래야 후세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도 뒤따라올 겁니다. 이 점을 명심해 주길 바랍니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