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군인이 곧 정의로운 군인은 아니다 - ‘영욕의 에이스’ 한스 울리히 루델
2차 대전 독일 슈투카 폭격전대의 영웅
소련 전함 마라호에 폭탄 2회 적중 격침
전차 519대·전투기 70여 대 등 파괴
대공포 파편에 다리 잃고 의족 출격도
전후 사관학교 교관·기술 자문 등 활동
나치 옹호·전범 도피 관여 의혹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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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인간의 의지와 신념을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나치 독일의 파일럿 한스 울리히 루델(1916~1982)의 활약과 생애는 ‘전쟁영웅’과 ‘나치 옹호자’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으면서 줄곧 논쟁의 대상이 됐다.
독일 동부 콘라츠 발다우에서 출생한 루델은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에 매혹됐다. 1936년 독일 공군 비행학교에 입학한 루델은 전투기 조종을 지원했지만 당시 대량 생산에 들어간 Ju-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 전대에 배속됐다. 그러나 루델은 폭격전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장거리 정찰비행대로 전직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그는 장거리 정찰 비행으로 기갑부대를 선도했고, 이 공로로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 후 오스트리아 빈의 항공대 교관으로 배치돼 대프랑스전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영국 항공전이 시작되자 루델은 재훈련을 받고 슈투카 폭격전대에 합류했다. 루델은 자주 팀 전술을 어기고 실수를 거듭해 영국 항공전에 참전하지 못했고, 1941년 크레타 전투에서도 기량 미달 평가를 받고 비행에 나서지 못했다. 그는 홀로 연구를 하며 기량을 닦았다.
1941년 6월, 대소전이 시작되자 루델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개전 초기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방향으로 진격하던 독일 북부 집단군은 핀란드 연안 크론슈타트에서 활동하는 소련 전함 ‘마라’호의 포격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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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3600톤급 대형 전함 마라호의 305㎜ 거포 사격에 독일군은 연일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격침 작전에 나선 루델은 마라호에 500㎏급 폭탄을 명중시켰다. 마라호는 대파됐으나 가까스로 침몰을 면했다. 다시 출격한 루델은 수천 문의 대공포 사격을 뚫고 300m까지 급강하해 1톤짜리 폭탄을 적중시켰다. 마라호 격침으로 루델은 독일 공군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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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길어지면서 슈투카는 ‘퇴물’로 전락했다. 개전 초기 슈투카의 사이렌 소리는 승리의 상징과도 같았으나 속도가 느린 슈투카는 점차 전투기와 대공화기의 손쉬운 표적이 됐다. 특히 영국 항공전에서 수백 대가 격추되면서 슈투카는 구식 전투기 취급을 받았다. 그런 슈투카에 탑승한 루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2530회 출격해 경이로운 전과를 올렸다.
루델은 동부전선에서 519대의 전차와 800여 대의 장갑차·트럭을 파괴했다. 지상에 주기 중인 전투기 70여 대를 파괴하고, 소련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여 9대를 격추했다. 또한 다수의 교량, 대전차포대, 상륙정 70여 척도 파괴했다. 루델은 독일군에서 ‘황금 다이아몬드 백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의 유일한 수훈자였다. 루델의 이름은 소련군에도 널리 알려졌다. 스탈린은 루델을 ‘소련 인민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고, 10만 루블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는 당시 소련군 대대장 월급의 500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루델은 숱한 죽음의 고비도 넘겼다. 1944년 3월 21일에 격추된 루델은 소련군에 잡혀 수용소로 이송되는 도중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는 어깨에 총상을 입은 상태로 드네프르강을 헤엄쳐 건너 50㎞ 떨어진 독일군 진지로 무사히 복귀했다.
1945년 2월, 소련군은 베를린 근교 오데르강에 이르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출격한 루델은 소련군 대공포에 피격돼 불시착했다. 루델은 의사 출신이었던 후방 사수 ‘가더만’의 응급처치 덕분에 겨우 생환했으나 대공포 파편에 오른쪽 다리를 잃고 왼쪽 다리에도 심한 부상을 입었다. 불과 6주 후 그는 의족을 달고 다시 비행에 나섰다. 비행할 때마다 조종석은 피범벅이 됐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자 루델은 자신의 슈투카를 몰고 미군 기지에 착륙해 미군에게 항복했다. 미군은 루델을 넘겨달라는 소련군의 요구를 거절하고 그에게 치료를 제공했다.
루델은 전쟁범죄에 직접 가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받아 1946년 4월 석방됐다. 자유의 몸이 된 루델은 고향으로 돌아가 한동안 택시 기사로 일했다. 그는 의족을 단 몸으로 테니스와 수상스키를 즐겼고, 훗날 안데스 산맥 정상에도 올랐다.
루델은 1948년 남미의 친독(親獨)국가 아르헨티나의 항공산업 고문으로 채용돼 코르도바의 항공기술연구소에서 근무했다. 루델은 아르헨티나 통치자 판 페론과 친구가 됐고, 아르헨티나 공군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미국의 방산기업 페어차일드사도 지상공격기 ‘A-10 선더볼트’를 설계할 때 루델의 자문을 구했다.
한편 루델의 행적은 서독 사회에서 줄곧 논쟁이 됐다. 루델은 참전 경력을 자랑스러워했고, 독일 극우정당에서 활동하면서 총선에 출마까지 했다.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만든 교류협회와 독일 해군 사령관을 지낸 칼 되니츠(1891~1980)가 루델의 정치자금을 지원했다.
루델은 나치 전범들이 아르헨티나로 도피할 때 은밀히 도왔다는 의심도 받았다. 그 중에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잔악한 생체실험을 주도해 ‘죽음의 천사’로 불린 요제프 멩겔레(1911~1979)도 있었다.
1976년 파라과이에서 귀국한 루델은 공군 모임에서 나치 옹호 발언을 했다. 당시 서독 공군 장성 카를 하인츠 프랑케와 발터 크루핀스키가 루델의 발언에 동조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고 두 사람은 강제 예편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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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델이 1982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에도 논란은 그치지 않았다. 장례식에 모인 옛동료들과 추종자들이 나치식 경례를 하고, 서독 공군 소속 F-4 전투기 두 대가 장례식장 위를 비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독 공군은 공교롭게 훈련과 겹쳤다고 해명했으나 언론들은 서독 군대가 나치의 유산을 청산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독일 정부는 나치주의자들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루델이 묻힌 정확한 위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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