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중정기념당 초 단위 제식동작 ‘위병 교대식’에 감탄

입력 2023. 06. 07   16:59
업데이트 2023. 06. 0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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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대만 ①

총통부 가까운 국군역사문물관
대만군 발전과정 담은 사료 보존
모병제 시행 이후 병력확보 어려움
전국에 복지시설 등 다양한 혜택
국립고궁박물관 4대 박물관 꼽혀

장제스 동상 앞에서의 위병 교대식.
장제스 동상 앞에서의 위병 교대식.


동아시아에 있는 타이완은 한국식 발음으로 대만(臺灣)으로 불리며, 79개의 도서를 가졌다. 수도는 타이베이이며 인구 2357만 명에 면적은 3만6197㎢(대한민국의 3분의 1 크기), 연 국민 개인소득은 3만 3565달러 수준이다. 현재 6600여 명의 한인 교민이 대만에 거주하며, 한국 체류 대만인은 2만313명에 이른다. 군사력은 상비군 15만9000명(육군 9만4000, 해군 4만, 공군 2만5000), 예비군 165만7000명을 보유하고 있다. 병역제도는 2018년 모병제로 전환하면서, 청년들은 4개월 군사훈련으로 군 복무를 대체했다. 그러나 직업군인 지원인력 부족, 안보정세 변화 등으로 2024년부터 12개월 의무복무의 징병제로 전환될 예정이다.


자유광장의 한국 대학생과 위병 교대식

중정기념당 내의 장제스 동상과 좌·우측 위병.
중정기념당 내의 장제스 동상과 좌·우측 위병.


타이베이 중심부에 ‘자유광장’ 현판이 있는 건축물을 지나면 25만㎡면적의 넓은 공원이 나온다. 중심부에는 높이 76m의 웅장한 ‘국립중정기념당(國立中正紀念堂)’이 자리 잡고 있다. 광장에서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온몸을 흔드는 학생들의 거리공연에 시민들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선보이던 열정적인 공연이 끝나자, 관람객들의 기념사진 촬영이 이어졌다. 

알고 보니 대만 젊은이들이 아닌 한국 대학생들이다. 세계를 누비는 한국인들의 열정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광장에서 중정기념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숫자는 정확히 89개다. 장제스가 1975년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를 상징한다. 기념당 안의 무게 25톤에 달하는 장제스 동상과 더불어 볼만한 것은 24시간 그의 곁을 지키는 위병들의 교대식이다.

육·해·공군에서 선발된 최고의 ‘훈남 군인’이 보여주는 이 교대식은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매 시각 정시에 일체의 구령 없이 좌·우측 위병은 초 단위 제식동작을 서로 맞춰 가며 근무자 교대를 한다. 자로 잰 듯이 정확한 보폭과 집총 동작의 일치는 감탄을 자아낸다. 교대식 후 동상 옆의 위병은 돌부처마냥 미동도 하지 않고 부동자세로 1시간을 버틴다. 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경찰관 1명이 위병 옆을 오가며 눈빛으로 서로 대화하고 있었다.


대만 현대사와 중정기념당

중정기념당에서 본 자유광장.
중정기념당에서 본 자유광장.


1층 전시관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장제스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일기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사료다. 1943년 12월 1일,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서 최초로 약속했던 ‘카이로 선언’ 사진도 눈에 띈다. 루스벨트·처칠·장제스 외 묘령의 한 여인도 사진 속에 있었다. 통역을 맡았던 장제스의 부인 숭메이링(宋美齡)이란다. 또한,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의 대만 방문 기록 등 한반도와 관련되는 사료들도 전시돼 있다.

하지만 2000년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벤이 총통이 되면서 전국 각지의 장제스 동상은 사라졌다. 이어서 ‘중정기념당’을 ‘대만민주화기념관’으로 바꾸고, 1층 전시관도 폐쇄됐다. 그러나 2008년 국민당의 마양주가 당선되면서, 다시 장제스의 긍정적인 평가는 복원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중정기념당’은 대만 현대사의 명암을 알려주는 역사 공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국군역사문물관에서 본 대만 군대

국군역사문물관 옆에 있는 군인호텔 내부.
국군역사문물관 옆에 있는 군인호텔 내부.


타이베이의 일부 관공서는 일본 식민지 건물을 재활용하고 있다. 1919년에 완공된 르네상스식 총독부 건물은 현판만 바꿔 대만 총통부가 됐다. 최고법원, 감찰원, 국립박물관·도서관은 모두 식민지 시대 건축물이다. 총통부에서 가까운 국군역사문물관 외벽에는 ‘군인모집’을 홍보하는 대형 사진들이 붙어 있다.

1961년에 개관한 이 문물관은 국민혁명군 이후부터 중일전쟁·국공내전과 오늘날의 대만군 발전과정을 담은 사료를 보존하고 있다. 총 5개의 전시실은 창군, 황포군관학교, 북벌, 난징대학살, 진먼도 요새 등 100년 전통의 대만군 역사를 재현한다. 또한, 진먼 포격전 50주년(2008), 황포군관학교 개교 90주년(2014), 북벌 출병 90주년(2016) 등 특별 기념전으로 신세대들에게 훌륭한 역사교육의 현장을 마련해 준다.

박물관과 연결된 군인호텔은 현역·예비역들을 위한 복지시설이다. 로비에서 만난 군 간부에 의하면 전국의 많은 복지시설과 다양한 혜택이 군인들에게 주어진단다. 그러나 대만군은 모병제 시행 이후, 병력확보 곤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단다. 사생활 통제, 격오지 근무, 업무 위험성, 낮은 급여 등으로 인해 신세대에게 군대는 매력적인 직장이 되지 못했다. 급기야 여군 모집 확충, 지원연령 상향조정, 신체조건 대폭 완화 등 응급처방을 했지만, 모집 목표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단다. 심지어 육군군관(사관)학교의 신입생도 선발에도 정원보다 지원자가 부족한 실정이다. 모병제라는 안보 포퓰리즘의 안타까운 결말을 보는 것 같았다.


대만의 아픈 상처 2·28 사건

자유광장에서 20여 분 거리에 2·28사건 기념관과 기념공원이 있다. 1947년 2월 28일 저녁, 타이베이시에서 무허가 담배를 팔던 ‘린장마이’라는 여인이 단속 공무원과 실랑이를 벌였다. 당시 술과 담배는 정부의 전매 상품으로 주된 조세 수입원이기도 했다.

선처를 호소하는 그 여인을 공무원들이 폭행하자, 시민들이 항의하면서 충돌이 발생했다.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나갔고, 1년여 동안의 국민당 통치에 대한 대만 주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3월 8일, 중국 본토에서 증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두 달 반 동안에 2만8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간 계속된 계엄령하에서 2·28사건은 금기에 붙여졌다. 그러나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2·28평화기념일’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했다.


69만 점의 보물을 가진 국립고궁박물관

타이베이의 고궁박물관은 미국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프랑스 루브르미술관에 이어 세계 4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국공내전 당시 유물 운반 선박의 폭격 주장에 마오쩌둥은 “대만으로 가져가도 중국 유물은 유물이니, 그냥 놔두라”라고 했단다. 이곳에는 베이징 고궁박물관의 유물 중 약 22%인 69만 점을 보관하고 있다. 전체 유물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지만, ‘최고 중 최고(best of best)’ 유물만을 골라서 가져왔다. “만약 중국과 전쟁이 나면 고궁박물관이 제일 안전한 대피장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 정부도 아끼는 박물관이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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