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영화

핵 위기에 날리는 싸늘한 조소

입력 2023. 06. 07   16:49
업데이트 2023. 06. 07   17:00
0 댓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진: 피터 셀러스,조지 C. 스콧, 스테링 하이든

1962년 쿠바, 미국의 피그만 침공 실패가 부른 대재앙
소련의 미사일 기지 설치 두고 전운 고조
핵전쟁 직전까지 간 역사적 사건…편협한 권력자 등 씁쓸한 현실 풍자


“합리적 행위자 모델은 그 국가의 행위가 합리적임을 가정하고 그에 대한 원인을 역으로 찾아 나가는 과정을 포함하기에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충분한 자료조사가 뒷받침되지 않았을 경우 상상에 의해서만 그 국가의 목적을 설정하고, 또 행위를 그 목적에 끼워서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놓은 잘못된 예측은 히틀러의 목적을 오판한 영국·프랑스 당국자들의 예처럼 파멸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결정의 본질』 중, 그레이엄 앨리슨 지음, 모던아카이브 펴냄)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13일

냉전 시대 가장 심각하면서도 극적인 대결은 1962년 쿠바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돌려보자. 1958년 카리스마적 공산주의자 피델 카스트로가 권력을 잡았다. 이 사건은 세계의 세력균형에 일어난 중대한 변화였다. 미국으로부터 65㎞밖에 떨어지지 않은 섬이 갑자기 종속적인 동맹국에서 소련의 위성국으로 바뀐 것. 미국은 무력을 포함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국면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1961년 케네디가 집권하자,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작전 안을 내놓았다. 쿠바 민주혁명전선으로 알려진 무장 망명자 1500명을 피그만에 상륙시키고, 반카스트로 민중 봉기를 촉발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결과는 대실패. 미국의 서투른 시도는 대재앙이었다. 카스트로는 이를 계기로 반대 세력을 숙청할 명분을 잡았다. 한술 더 떠 그는 소련과 손잡고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둘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계획 역시 피그만 침공만큼 정신 나간 것이었다. 이런 군사 조치가 미국의 눈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1962년 10월 15일 U2기가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관측 촬영했다. 16일부터 백악관은 매파와 비둘기파로 나뉘었다. 케네디는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오락가락했다. 공습 준비를 계속하라고 명령했지만, 격리 작전을 택했다.

22일 케네디는 분장도 하지 않고 눈에 띄게 피곤한 모습으로 TV에 출연했다. 그는 흐루쇼프에게 이틀 뒤까지 무기들을 철수시키라고 못 박았다. 24일 소련의 미사일을 실은 배가 격리 라인에 접근하다가 정지했다. 케네디와 흐루쇼프 사이에 숨 가쁜 제안들이 오갔다. 28일 결국 흐루쇼프는 미사일 철수에 동의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13일’이었다. 흐루쇼프조차 군부와 논의하는 동안 “5억 명이 죽을지 모른다”라고 우려했을 정도였다. 케네디가 위기를 처리한 솜씨는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칭송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당시 케네디를 비롯한 핵심 참모들도 상황의 전모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련과의 협상에 나선 것으로 드러났다. “결정의 궁극적인 본질은 제삼자가 이해할 수 없으며 결정하는 사람 자신도 모를 때가 잦다”라고 고백한 케네디의 말처럼 당시 13일은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블랙코미디의 결정판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고전 명작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너무나 유명해서 누구나 입에 올리지만 정작 본 사람은 드물다. 또한 다시 볼 때마다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다. 더불어 처음 볼 때조차도 이전에 본 것을 ‘다시 보는’ 느낌을 준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가 그렇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영화를 만든 계기는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다. 영화는 핵전쟁의 위협을 적나라하게 희화화하는 전형적인 블랙코미디이자, 동시에 다큐멘터리(?)다. 감독이 조롱하고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는 관료주의와 편협함에 사로잡힌 권력자, 부조리한 상황을 수습하는 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실제 인물의 복사판이다.

미 공군의 잭 D.리퍼 장군(스털링 헤이든)은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인의 신성한 혈통을 오염시킬 음모를 꾸민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핵 폭격기를 출격시킨다. 잭 리퍼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라고 말하며 ‘도쿄 대공습’을 주도한 당시 미 육군항공대 커티스 르메이 소장(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 공군참모총장)이 모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련 서기장과 직접 통화해 상황을 수습하겠다고 나선 머킨 머플리 미 대통령(피터 셀러스, 영국공군 대위 라이오넬 맨드레이크·천재 과학자 스트레인지러브 박사 1인 3역)은 겉으로 보면 합리적이지만 실상은 군 장성에게 휘둘리는 나약한 허수아비일 뿐이다.

소련은 핵 공격을 당하면 지구가 파멸되는 ‘운명의 날’이 올 것이라 경고한다. 과연 폭격기를 제시간에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잭 리퍼 장군이 세계를 파멸시킬 것인가?


지구 종말 90초 전,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우크라 전쟁에 ‘지구 종말 시계’ 10초 당겨져
1947년 첫 설정 이후 종말에 가장 근접

원자폭탄이 탄생시킨 SF 걸작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포스터. 간략한 기호와 상징 안에 메시지가 강렬하게 녹아있다. 사진=컬럼비아 픽처스
원자폭탄이 탄생시킨 SF 걸작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포스터. 간략한 기호와 상징 안에 메시지가 강렬하게 녹아있다. 사진=컬럼비아 픽처스

 

90초 뒤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90초라면 사과나무 심기는 물론이고 그 무엇을 준비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다. 미국 핵 과학자협회(BSA)는 올해 1월 24일 ‘지구 종말 시계(둠스데이 클락)’ 초침이 파멸의 상징인 자정 쪽으로 10초 더 이동했다고 발표했다. 1947년 첫 설정 이후 종말에 가장 근접한 상황이다.

BSA는 지난 2020년 이후 지구 종말 시계를 100초 전으로 유지해 왔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핵무기 사용 우려가 고조되면서 경고 수위를 높인 것. 기후 위기와 더불어 코로나19 같은 생물학적 위협도 사유로 꼽혔다. 북한의 핵 위협도 빼놓을 수 없다.

‘운명의 날 시계’로도 불리는 지구 종말 시계는 맨해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개발계획)에 참여했던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과학자들로부터 시작됐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참상을 지켜본 이들은 1947년 대중에게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학회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표지 디자인을 맡은 예술가 마틸 랭스도프는 핵 위협의 긴급함을 반영해 카운트다운되는 시계를 선택했다.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이던 물리학자 알렉산더 랭스도프의 아내였다.

과학자들은 지구 곳곳에서 진행 중인 핵실험이나 핵무기 보유국들의 동향과 감축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 시간을 조정한다. 1947년 이후 최근까지 20여 차례 수정됐다.

자정 7분 전에서 시작한 최초의 종말 시계는 소련까지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 1953년에 자정 2분 전까지 다가갔다.

이 시계의 시간은 거꾸로도 흐른다. 자정에서 가장 멀리 조정된 시점은 1991년 미국과 소련이 전략적으로 무기 감축 조약을 체결할 때였다. 자정으로부터 17분 멀어진 오후 11시 43분을 가리켰다.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하자 11시 54분으로, 2017년에는 2분 30초 전, 2018년에 2분 전으로 조정됐고 2020년에는 20초 당겨졌다. 남은 시간이 적어지면서 분 단위로 세던 종말 시간도 초 단위를 바뀌었다.



사진=컬럼비아 픽처스

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