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황량한 벌판 호이안 청룡부대 주둔지엔 잡초만 무성

입력 2023. 05. 31   16:44
업데이트 2023. 05. 3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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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베트남④

어렵사리 찾은 한국군 옛터 도착하니
부대 일 했다던 현지인 쏜살같이 달려와
참전용사들과 찍은 사진 보여줘

다낭으로 가는 길 옆 군용비행장
미 공군 격납고 줄지어 남아 있어
 

현지 베트남인이 보여준 청룡부대 상징탑과 해병대원 사진.
현지 베트남인이 보여준 청룡부대 상징탑과 해병대원 사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격언은 태평성대에는 인기가 없다. 베트남전쟁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준다. 남베트남군은 병력·화력·장비에서 적군을 압도했다. 북베트남군은 식량도 부족했고, 부식은 소금밖에 없었다. 굶주린 병사들은 영양실조자가 속출했고, 신발은 폐타이어로 만들었다.

이에 비해 남베트남군은 육류와 쌀밥·빵을 배불리 먹었고, 튼튼한 가죽 군화를 신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은 ‘왜 싸워야 하는지?’를 잊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막강했던 군대는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호이안·다낭의 전쟁유적과 군사박물관은 이런 교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파월 한국군 주둔지에서 ‘혹시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이 아닌지?’를 되새겨봤다.


‘호이안’행 버스에서 만난 외국인 여행객

‘후에’에서 호이안으로 가는 버스 편을 숙소 직원이 상세하게 알려준다. 터미널까지의 교통편의도 서비스로 제공해 준단다. 그의 친절에 감사하며 로비에서 기다리니 한 소년이 찾아왔다. 소형버스를 상상하며 따라가니 현관에는 오토바이 한 대가 있었다. 소년의 꽁무니에 매달려 한참을 달리니, 낡은 소형버스들이 공터에 모여 있다. 배낭을 짊어진 독일인 가족과 함께 그 차량 편으로 비로소 터미널에 도착했다.

장거리 운행이 많은 탓인지, 호이안행 버스는 2층 침대형이다. 의자로 변형이 불가능한 침대 덕분에 드러누운 자세로 3시간 30분 동안 차창 밖을 봐야만 했다. 차 내의 외국인 여행객 복장은 대부분 편안하고 자유롭다. 화장도 하지 않은 여성들은 예사로 대형 배낭을 짊어지고 다닌다. 멋진 복장에 여행용 가방을 끄는 한국인 관광객들과는 대조적이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호이안 한인 식당

호이안의 택시 기사에게 부탁해 찾아간 한인 식당에 들어서니, 베트남 종업원이 반갑게 맞이한다. 한국인 사장을 찾으니 어린 여직원은 “사장 없어!”라고 다짜고짜 반말이다. 웃음 띤 동그란 눈망울이 악의는 전혀 없어 보였다. 이제 막 한국말을 배우는 모양이다. 멀리서 지켜보던 다른 직원이 달려와 주인과 통화하자, 잠시 후 Y씨가 나타났다.

6년 전에 식당을 개업한 그는 코로나 불황도 잘 극복했단다. 2층 식당은 가족 단위 한국 관광객들로 빈자리가 없다. 최근 해외 여행객의 폭발적인 증가로 다낭·호이안은 호황을 누린다. Y씨에게 청룡부대 주둔지를 물으니 미안해하며, 자신도 현장에 가보지 못했단다. 대신 믿을 만한 운전기사 텐(Ten)을 소개해줬다. 성실해 보이는 그는 오랫동안 호텔에 근무해 영어가 유창했다. 하지만 아내, 두 자녀, 어머니까지 부양하기에는 너무 급여가 적었다. 결국 중고 승용차를 구입해 관광 안내인으로 직업을 바꿨단다.



청룡부대 주둔지를 관리하는 베트남인

호이안 청룡부대 주둔지의 일부 전경.
호이안 청룡부대 주둔지의 일부 전경.

 
텐 역시 한국군 옛터를 알지 못했지만, 주민들에게 물어가며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황량한 벌판 위의 청룡부대 부지는 잡초가 무성하다.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던 한 남성 A씨가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온다. ‘대한민국 해병대’ 글자를 새긴 빨간 티셔츠를 입은 그는 한국군 참전용사들과 찍은 큼직한 사진들을 펼쳐 놓는다. 텐에게 통역을 부탁하니, A씨가 언어장애를 갖고 있어 소통이 어려웠다. 대신 숫자와 그림, 손짓으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54년생인 그는 1968년부터 부대를 출입하며 허드렛일로 한국군을 도왔다. 해병대원들은 자신을 아꼈고, 1972년 청룡부대가 철수할 때 눈물로 이별했다. 식당·사격장·축구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해병 상징 비석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다. 가끔 옛 베트남 소년을 기억하는 참전용사와 바로 이곳에서 재회의 기쁨도 누린다”라고.

당당하게 해병전우회 유니폼을 입고 옛 주둔지를 배회하는 그는 열렬한 한류 팬이다. 정문만 외롭게 남아 있는 부대 부지는 해변에서 멀지 않았다. 관광지 개발 분위기에 한국 청년들의 피땀이 서려 있는 옛 주둔지는 머지 않아 사라질 것 같았다.

한국군을 도운 사람이 공산 치하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었는지 텐에게 조용히 물었다. 텐은 “아마 언어 장애로 처벌을 면했을 것 같다”라고 귀띔한다. 그리고 텐은 “자신의 할아버지는 남베트남군 파일럿이었고, 아버지도 미군 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가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아버지 군복 사진을 많이 봤단다. 그 사진을 볼 수 있느냐고 하니, 오래 전 홍수로 그 사진을 포함한 모든 가구가 몽땅 떠내려갔다고 했다.


망국의 길로 치닫은 다낭전투의 패배

다낭 교외 비행장에 남아 있는 미 공군 격납고 전경.
다낭 교외 비행장에 남아 있는 미 공군 격납고 전경.


다음 날 다낭으로 가는 길 옆의 군용비행장에는 미 공군 격납고가 줄지어 남아 있다. 작은 성곽 속의 다낭 역사박물관은 베트남전쟁 자료가 대부분이다. 다낭에 상륙하는 한국군 사진 자료 옆에는 엉뚱하게 향토예비군 마크가 끼어 있다.

1975년 3월, 북베트남군의 다낭 점령은 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하노이 전쟁지도부에 침투한 미 중앙정보국(CIA) 첩보원들은 공산군의 공격 계획을 정확하게 예고했다. 하지만 공산군보다 4배의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남베트남군은 확고한 전투 의지가 없었다. 1975년 3월 10일, 북베트남군 대포와 로켓포가 국경선에서 불을 뿜었다. 티우 대통령은 중부고원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군대 철수를 명령했다. 50만 병사와 피난민으로 다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남베트남군 10만이 주둔한 다낭은 피난민으로 인구가 300만에 육박했다. 3월 30일 퇴로가 차단된 다낭의 남베트남군은 전원 포로가 됐다. 군수기지의 10억 달러 상당 전투물자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고스란히 적의 손으로 넘어갔다. 2년 전쟁을 계획했던 북베트남군도 단 2달 만에 끝난 전쟁에 의아해했다.


군사박물관에서 본 중·월 전쟁의 역사

다낭 제5군구 군사박물관 전경. 야외에 진열된 군사 장비는 대부분 미국산이다.
다낭 제5군구 군사박물관 전경. 야외에 진열된 군사 장비는 대부분 미국산이다.


친절한 역사박물관 직원이 또 다른 ‘제5군구 군사박물관’을 소개했다. 군부대와 인접한 이 박물관은 군복 차림의 여직원이 안내소에 있었다. 야외에 진열된 군사장비는 대부분 미국산 노획물이다. 3층 규모의 전시관은 대불(對佛)·대미(對美)·대중(對中) 전쟁까지의 30년 베트남항전역사를 소개한다.

1975년 전쟁이 끝나자, 어제의 혈맹이었던 베트남과 중국 갈등이 폭발했다. 화교 탄압과 캄보디아 침공의 이유로 1979년 2월 17일, 중국군 20만 명이 베트남을 침공했다. 정규군 대부분이 캄보디아에 있어, 10만 베트남 민병대가 침공군에 맞섰다. 중국군의 구태의연한 인해전술은 게릴라전으로 ‘치고 빠지는’ 민병대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3월 16일 중국군은 수만 명의 사상자만 남기면서 휴전에 동의하고 본국으로 철수했다. 내일은 분쟁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타이완으로 떠나기로 계획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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