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40) 정태조 6·25참전유공자회 세종시지부장

전옥신

입력 2023. 05. 22   16:55
업데이트 2023. 08. 07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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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전의 기억… 지금도 뇌리에
피땀·눈물 함께 흘린 전우 생각에 가슴 아려와
6·25 세대 공감해 줬으면…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40. 정태조 6·25참전유공자회 세종시지부장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로 시작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각종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순서다.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시간일 수 있지만, 조국을 지키기 위해 청춘을 바친 참전용사들은 지금도 태극기를 바라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혹한 전장에 몸을 던졌고, 이제는 태극기 사랑에 앞장서는 참전용사가 있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마흔 번째 주인공으로 정태조(89) 6·25참전유공자회 세종시지부장을 만났다.

글=배지열/사진=이경원 기자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마흔 번째 주인공인 6·25참전유공자회 세종시지부장 정태조 옹.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마흔 번째 주인공인 6·25참전유공자회 세종시지부장 정태조 옹.

 

정태조 옹이 받은 호국영웅기장과 국민훈장 동백장.
정태조 옹이 받은 호국영웅기장과 국민훈장 동백장.

 

정태조 옹의 자택 벽면에 걸린 화랑무공훈장 액자.
정태조 옹의 자택 벽면에 걸린 화랑무공훈장 액자.

 

참전유공자회 활동 사진을 모은 앨범의 한 페이지.
참전유공자회 활동 사진을 모은 앨범의 한 페이지.



일본인 학우 괴롭힘에도 학업 이어가

정옹은 일본에서 태어나 학교에 다녔다. 그때의 기억은 90대를 앞둔 지금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 일본인이라고 다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중학교에서 저 혼자 한국인이었는데, 그만큼 괴롭힘도 심했죠. 견디다 못해 학교를 그만둬야겠다고 다짐하고 가방을 싸서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당시 일본인 선생님은 한국인 제자를 꾸짖거나 무시하는 대신 따뜻하게 안아 줬다. 정옹은 “선생님은 나중에 해방이 되면 조국을 위해 일해야 하는데, 한 가지는 배워 가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다”며 “그때 처음 ‘민족성’과 ‘국가관’이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선생님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의지를 굳게 다진 소년은 이후로는 주변의 놀림과 무시를 이겨내고 무사히 졸업했다.

광복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정옹은 국민방위군을 거쳐 예비사단에 배치받았다. 주로 전남 구례·곡성에 있는 지리산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됐다. 정옹은 “하루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어디선가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많이 났다”며 “알고 보니 공비가 아군을 죽이고 시체를 불태운 거였는데, 절로 적개심이 불타올랐다”고 전했다.

전장에서의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옹이 속한 예비사단까지 수도사단으로 편입돼 곧장 전장으로 향해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눈물을 보이시더군요. 두 분이 제 손을 잡고 기도해 주셨는데, 그 덕분에 무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임무 수행 중 포탄 파편에 부상당해

1952년 2월 1일, 보병 직별을 받은 스무 살 청년은 수도사단 26연대 5중대에 배치됐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정옹의 뇌리에 박혀 있는 전장에서의 기억은 수도고지전투다. 1952년 7월부터 1년 동안 강원도 화천군 금성천 북쪽 수도고지를 두고 수도사단·8사단이 적과 맞서 싸운 고지전이다.

적과 몸으로 맞붙어 싸운 백병전이 벌어진 만큼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정옹은 “적은 몰려오는데 총이 고장 났는지 사격이 안 되더라”며 “알고 보니 탄창을 거꾸로 끼우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급박했다”고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70년 전 일이지만 정옹은 아직도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가 선명하다고 한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지, 머리 위로 지나가는지를 잘 보면 구분할 수 있다며 비결을 알려 주기도 했다.

“총탄이 나를 향해 날아오면 그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방향까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상대적으로 소리가 약하면 머리 위로 날아간다는 의미인데, 그것도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정옹에게 상처를 남긴 건 총탄이 아닌 포탄이었다. 그는 “수도고지전투 중 중대본부에 연락을 전하러 이동하고 있었는데, 가까운 곳에서 포탄이 터졌다”며 “어깨에 파편이 박혀 병원으로 후송됐고, 지금도 국가유공 상이등급 7급에 등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치열한 혈투 끝에 1953년 7월 27일 정전을 맞았다. 더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보다는 허무함이 먼저 들었다는 정옹. 그는 “몇 년 동안 치열하게 목숨 바쳐 싸워 온 시간이 공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전장에서 몸을 바친 활약으로 정옹은 1954년 5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어 1955년 6월 하사로 전역했다.

열악한 보급 때문에 견뎌내야 했던 추위와 배고픔, 두려움 등은 청년 정옹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성질이 나빠 그런지 적과의 백병전에서는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다른 데서는 온순했는데, 전장에서만큼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몰라도 그 상황에서는 ‘조국’만을 생각하고 싸운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강인한 전사였던 정옹도 피와 땀, 눈물을 함께 흘린 전우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온다. 그는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대구 달성군 출신으로 저를 많이 배려해 준 예비사단 중대장님이 잊히지 않는다. 또 선배 전우들에게 적지 않은 은혜를 입었는데 늦게나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태극기 선양운동 등으로 나라사랑 이어가

정옹의 가슴속에는 어린 시절 타지에서 애국심을 불태운 소년의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태극기를 향한 사랑이 남다르다. 2001년부터 태극기 선양사업에 뛰어든 그는 국경일 전후로 시가지를 순회하면서 태극기 달기 운동을 홍보하고 태극기를 나눠 줬다.

자비를 들여 태극기와 태극기 걸이대를 제작하는 그에게 많은 이가 박수를 보냈다. ‘애국심 깨우는 할아버지’로 지역 매체에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로 2008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지역 참전용사를 아우르는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참전유공자회 연기군지회 창립 멤버로 2005년부터 이름을 올렸고, 행정지역이 바뀌면서 세종시지회장을 거쳐 지난 12일에는 지부로 승격한 세종시지부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지역에 있는 9개 보훈단체를 6·25참전유공자회가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취임 일성을 밝혔다.

회원 수 149명의 참전유공자회 세종시지부는 매년 7월 11일 세종시 전동면 청람리에 있는 ‘자유평화의 빛 위령비’에서 추모제를 지낸다.

이곳은 1950년 7월 11일부터 6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미 24사단 장병 517명이 전사한 격전지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당시 무공수훈자회 충남도지부 연기군지회장을 맡고 있던 정옹의 노력으로 기념비가 세워졌다. 미군 전사자 517명의 이름도 새겨 넣었고, 매년 미군 지휘관도 빠짐없이 방문하도록 기틀을 다졌다.

정옹의 마지막 목표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장병들에게도 태극기에 대한 존엄성과 확고한 국가관을 심어 주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이가 많아지면 적이 비집고 들어올 공간이 없을 겁니다. 후세가 우리 6·25전쟁 세대의 공적을 인정하고, 우리도 후세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걸 적극 공유하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전옥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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