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39) 장단·사천강지구전투 참전 구장회 6·25참전유공자회 이사

입력 2023. 05. 15   17:18
업데이트 2023. 08. 0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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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 생활에 몸무게 43㎏ 신검 불합격 
입대하려고 매일 부대 앞에 서 있었지
전쟁은 말할 수 없이 끔찍하고 비참해
참상 반복돼선 절대 안 되지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39 장단·사천강지구전투 참전 구장회 6·25참전유공자회 이사

15세에 가족과 서울서 남쪽으로 피란
수원서 폭격 맞고 난리 통에 가족과 이별
혈혈단신 부산 내려가 구두닦이

나라 위해 몸 바치겠다 각오
해병대 모집 포스터 보고 입대 결심

처음 배치된 백마고지서 전투 치르고
장단·사천강지구전투 투입

정전협정 타결 소식에
해병대원들 소총 들어 던지며 기쁨 만끽

참전유공자회 이사 활동
6·25 세대 이제 소멸 단계
호국보훈정신 후대가 계승하도록
후자녀 관련 입법 추진
정부와 국회서 관심 가졌으면

구장회 6·25참전유공자회 이사가 지난 12일 서울 강동구 호국보훈회관에서 국방일보와 인터뷰를 마친 뒤 ‘호국영웅’ 글자가 적힌 현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구장회 6·25참전유공자회 이사가 지난 12일 서울 강동구 호국보훈회관에서 국방일보와 인터뷰를 마친 뒤 ‘호국영웅’ 글자가 적힌 현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단·사천강지구전투는 6·25전쟁 당시 해병 제1전투단이 1952년 3월 17일부터 이듬해 7월 27일까지 중공군 공세로부터 파주 도라산 일대를 지켜 낸 전투다. 해병대는 약 5000명의 병력으로 중공군 4개 사단의 공격을 모두 격퇴하며 정전협정 발효 때까지 16개월간 수도 서울로 향하는 관문을 굳건히 사수했다. 70년 전 그날, 정전협정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접한 해병대원들은 기쁨의 만세를 불렀다. 당시 전선에 있던 구장회(88) 옹 역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했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서른아홉 번째 주인공으로 구옹을 만났다.

글=이원준/사진=조종원 기자


중학생 때 전쟁 발발…피란 중 가족과 생이별

지난 12일 서울 강동구 6·25참전유공자회 사무실에서 만난 구옹은 자신을 ‘참전용사 막내’라고 소개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15세 소년이 기억하는 전쟁의 첫 장면은 피란길이다. 북한군이 서울에 들이닥치면 다 죽는다는 소리에 서둘러 보따리를 꾸렸다. 어머니, 누이동생과 셋이서 무작정 남쪽으로 향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살면서 휘문중에 다니고 있었어. 하루는 통장이 전쟁이 났다고, 북한군이 오면 다 죽는다며 동네를 돌았지. 급하게 보따리를 만들어 짊어지고, 어머니·동생과 함께 집을 떠났어. 한강에 와 보니 다리가 끊겨 있더군. 지금의 원효로 쪽에서 배를 얻어 타고 노량진으로 갔어. 수원쯤 왔을 때 폭격을 맞았지. 그 난리 통에 어머니·동생과 헤어져 그때부터 혈혈단신으로 부산까지 갔어.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눈물이 앞을 가려.”

석 달에 걸쳐 도착한 부산에서의 생활은 끔찍했다.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가족과 헤어진 슬픔에 빠져 있을 틈도 없었다. 낮에는 구두를 닦으며 돈을 벌었고, 밤에는 부산 영도다리 아래 허름한 배 위에서 잠을 잤다. ‘완전히 거지꼴’이었다고 구옹은 표현했다.

구옹은 부산 생활을 계속하다 입대를 결심했다. 길을 걷다 우연히 해병대 지원병 모집 포스터를 발견하면서다. 그는 그때를 또렷하게 기억했다.

“어느 날 부산 광복동에 나갔는데, 해병대를 모집한다는 방이 붙어 있었어. 여기서 이렇게 죽을 바에는 전쟁터가 낫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나이는 어렸어도 당돌했지. 한두 살 많은 형들한테도 ‘이놈, 저놈’ 불렀으니까(웃음). 그렇게 1953년 3월 부산진역에 가서 진해행 기차에 몸을 실었지.”



‘체중 미달’ 소년, 해병대원이 되다

1953년 7월 해병 제1전투단 장병들이 장단·사천강지구전투에서 전사한 776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조총을 발사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1953년 7월 해병 제1전투단 장병들이 장단·사천강지구전투에서 전사한 776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조총을 발사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구옹은 진해에 있던 해병대교육단까지 갔지만 정문을 통과하지는 못했다. 신체검사에서 체중 미달로 불합격했기 때문이다. 그의 몸무게는 불과 43㎏. 오랜 피란 생활로 잘 먹지 못해 피골이 맞닿을 정도로 말랐었다. 하지만 구옹은 입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굳게 닫힌 부대 정문을 오갔다.

“입대시켜 달라고 나름대로 농성을 한 거지. 매일 정문 앞에 서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교육단장이 출근하면서 나를 봤나 봐. 웬 거지 같은 놈이 정문에 있으니 부관을 시켜서 나를 면담하겠다고 불렀어. 두려우면서도 영광이었지. 들어가니까 먼저 목욕을 시키고, 몸보다 큰 군복을 입혔어. 그리고 왜 매일 정문 앞에 있냐고 자초지종을 묻더군. 그래서 해병대가 되고 싶다고, 체중 미달이지만 나라를 위해 몸 바치겠다고 했지. 그때 교육단장님이 국방부 장관까지 지낸 김성은 장군이었어.”

그렇게 구옹은 18세에 해병 27기로 입대했다. 왜소한 체격에도 모든 훈련을 열외 없이 받았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악’을 질러 가며 버텼다. 훈련을 마치고 연병장에 앉아 배속 부대를 받았다. 구옹은 그해 7월 전방으로 투입됐다.

“처음 배치된 백마고지에서 8일간 전투를 치르고, 해병 제1전투단으로 발령받았어. 1대대 2중대 소속으로 장단·사천강지구전투에 투입됐지. 지금 도라산전망대가 있는 곳이야. 어렸지만 두려움은 없었어. 앞으로 나가라고 하면 전진하고, 엎드리라고 하면 엎드리면서 전투를 했지.”

해병대와 대치하던 중공군은 우세한 병력과 전술상 유리한 지형을 등에 업고 정전협정 체결 직전까지 위협을 가해 왔다. 해병대는 이곳이 뚫리면 수도 서울이 위험하다는 결의로 끝까지 적을 물리쳤다. 중공군은 장단·사천강지구전투에서 전사 1만4000여 명, 부상 1만1000여 명이라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해병대도 776명이 전사했다.

“전투 중 포탄이 떨어졌는데 옆에 있던 동기생이 파편에 맞았어. 손바닥만 한 파편이 얼굴을 치면서 그 자리에서 전사했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축 늘어졌던 모습이…. 그런 광경을 회상하자니 전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비참해. 그런 참상이 다시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될 일이야.”


정전협정 소식에 ‘살았다’ 안도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타결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장에는 휴전을 의미하는 청색 신호탄이 발사됐다. 구옹을 비롯한 해병대원들은 소총을 들어 던지며 기쁨을 만끽했다. 고향에 돌아간다, 부모님을 뵐 수 있다는 생각에 서로 껴안고 울부짖었다. 무엇보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구옹은 말했다.

구옹은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1년이 지난 뒤에야 휴가를 나올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쟁 통에 헤어진 가족을 찾는 것이었다. 서울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먼저 어머니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외가가 있던 충남 예산으로 향했다.

“버스 매표소에서 외사촌형 이름을 대니 저기 보이는 초가집으로 가라더군. 고맙다고 인사하고 그 집으로 향하니 여자 2명이 방아를 찧고 있고, 할머니 한 분이 절구통 뒤에 떨어진 보리를 줍고 계셨어. 인기척이 나자 할머니가 돌아서서 나를 봤지. 우리 어머니였어. ‘어머니!’ 외치며 껴안았더니 어머니가 ‘누구슈?’라고 하더군. 조그마했던 막내가 군복을 입고 나타나니 몰라본 거지. ‘제가 장회예요’라고 했어. 어머니하고 껴안은 채 한참을 울었어.”

어머니와 재회한 뒤 누이동생도 찾았다. 피란길에 이별한 세 가족은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구옹은 군 생활을 계속하다가 1966월 6월 30일 중사로 예편했다.

현재 6·25참전유공자회에서 이사로 활동하는 구옹의 마지막 바람은 후대가 6·25 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동족상잔을 기억해 그러한 참상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그는 강조했다.

“우리 6·25 참전용사가 평균 90세가 넘었어. 내가 제일 막내로 입대했는데 곧 아흔 살이 돼. 6·25 세대는 이제 소멸 단계에 와 있어. 그래서 우리가 목숨으로 나라를 지켰던, 그 6·25의 의미와 호국보훈정신을 후대가 계승하도록 후자녀(후손) 관련 입법을 추진하고 있어. 6·25전쟁은 절대 잊어선 안 되고, 이를 역사에 기록하는 게 우리 사명이자 임무라고 생각해. 6·25참전유공자회를 비롯한 많은 참전용사가 후자녀 회원화 법제화를 바라고 있는데, 정부와 국회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줬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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