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어려 불합격 판정 받았지만 형과 함께 하려 입대
정전 되고서야 현충원 묻힌 형 소식 들어
많은 이들이 참전용사 기억하도록 힘쓸 것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38. 임석환 6·25참전유공자회 경기도지부 포천시지회장
황해도서 가족과 살던 15살 때 전쟁 발발
중공군 들이닥칠거란 소식에
두 살 터울 형과 서울로 피난
길에서 만난 순경 얘기듣고 갔다가 징집
가장 무거운 박격포 포판 들고
포탄까지 8발 짊어지느라 생고생
치열하게 맞붙은 오성산전투
‘벼락탄’ 쏘자 북한군 두려워해
비 오면 산에서 내려온 물 받아마셨는데
시체가 얼마나 많았는지 대개 핏물
백마고지전투 지원부대로 출전
‘탄 있는 대로 쏟아부으라’ 명령에
죽기 살기로 임해
참전유공자회 포천시지회장 맡아 활동
전장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지킨 조국
강대국 만든 후세들 늘 고마워
청년들이 그려나갈 대한민국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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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인공 이진태(장동건 분)·이진석(원빈 분) 형제는 6·25전쟁이 만든 비극으로 전장에서 헤어진다. 결국 생사를 모른 채 흐른 수십 년의 세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연락에 형의 유해를 마주한 동생이 울부짖는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많은 이의 기억에 남아 심금을 울린다. 영화에서처럼 함께 전장으로 향했다가 전사한 형을 그리워하는 노병(老兵).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서른여덟 번째 주인공 6·25참전유공자회 경기도지부 포천시지회장 임석환(90) 옹이다.
글=배지열/사진=이경원 기자
부모님 같던 형과 이별하게 된 전장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평안남도에는 부모님과 4남매가 오손도손 살던 한 가정이 있었다. 임옹의 가족이었다. 임옹의 가족은 1948년 공무직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황해북도 황주군으로 거처를 옮겼다. 임옹은 그곳에 ‘인민학교’가 들어서고, 지역 분위기가 뒤숭숭해지자 학교에 다니는 대신 아버지에게 한글을 배웠다.
임옹이 15살이 되던 1950년 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이 승전고를 울린다는 소식이 들리던 것도 잠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평양을 거쳐 함경북도 청진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곧 통일이 이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꿈’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50년 12월 3일 임옹은 다니던 교회에서 미군에게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중공군이 들이닥칠 거라더군요. 그때만 해도 일주일만 몸을 피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돈과 어머니가 주신 쌀을 받아 형과 길을 떠났는데, 이후로는 부모님과 두 동생을 볼 길이 없었습니다.”
임옹의 형은 두 살 터울의 고(故) 임진환 참전용사다. 임옹은 유독 형을 따랐다고 한다. “나에겐 부모님 같은 존재였어요.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런진 몰라도 함께 한 좋은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두 사람은 꼬박 사흘을 이동해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장사에 소질이 있던 형과 함께 뻥튀기와 풀빵을 만들어 팔았지만, ‘북에서 왔냐’면서 텃세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밀려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형제에게도 전쟁의 손길이 뻗쳤다.
“12월 24일 성탄절 예배를 드리러 가던 길에 순경이 형을 붙잡고는 몇 살인지 묻더군요. 그러더니 내일 아침까지 파고다공원으로 나오라는 겁니다. 다음 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징집 대상이었던 거죠. 경기도 양평군을 지나 문경새재와 대구 팔공산을 넘어 부산까지 갔습니다.”
나이가 어렸던 임옹은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지만, 형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꼭 붙어 있다가 합격줄을 따라 군문에 들어섰다.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형제의 군번은 형이 019423, 임옹이 019425였다.
그렇게 임옹과 친형은 제주훈련소에서 8일간 총기 분해, 수류탄 투척, 철조망 통과, 야간 적응 훈련 등을 받고 군인으로 거듭났다. 둘은 함께 국군 5사단에 배치받았지만, 임옹은 최전방으로 향했고 형은 연대본부에 남으면서 운명이 갈렸다. 형이 강원도 인제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것.
백마고지전투도 참전…끝내 가족 찾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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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단 소속임에도 형의 소식을 몰랐던 임옹은 전장에서 갖은 고생을 겪었다. 5사단 35연대에 배치받은 임옹은 주로 81㎜ 박격포를 운용했다. 임옹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박격포 1문을 운용하는 데 9명이 필요한데, 내가 9번이라 가장 무거운 포판을 들어야 했습니다. 거기다 포탄까지 최대 8발을 짊어져야 했죠. 아마 그것 때문에 지금도 허리가 아프고 키가 안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성산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북한군과 치열하게 맞붙은 오성산전투에서는 105㎜ 견인포를 운용했다. “우리가 포를 많이 쏴줘야 한다면서 연대장이 주먹밥을 특별히 챙겨주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중에서 폭발해 소위 ‘벼락탄’이라고 불린 VT신관탄을 계속 쏘아 올렸는데, 북한군이 상당히 두려워했습니다.”
폭설과 매서운 추위로 고생했던 기억은 70년이 지났지만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비가 내리면 산꼭대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도랑물을 받아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산 능선을 따라 얼마나 시체가 많았는지 대개 핏물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노무자들이 꽁꽁 언 주먹밥을 지게에 지고, 고지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했죠. 거의 다 와서 비탈길에 미끄러지면 식량을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너무 미안해하던 모습이 선명합니다.”
임옹은 백마고지전투 현장에도 있었다. 그는 “앞장선 9사단에서 전력 손실이 커서 지원부대 일원으로 도착했다”며 “투입 전에 ‘탄을 있는 대로 쏟아부으라’는 명령에 죽기 살기로 임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나중에는 연락병이 전사하면서 2사단 32연대 통신병으로 차출되기도 했다.
“학교는 나왔는지, 지도를 볼 줄 아는지 물어보더니 임무가 바뀌었습니다. 전방의 전우들을 위해 식량과 실탄 등을 보급하고, 암호문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죠.”
그렇게 강원도 일대에서 여러 전투를 거친 임옹과 전우들에게 포탄 소리가 멈춘 정전이 찾아왔다. 임옹은 그때서야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힌 형의 소식을 들었다. 형의 묘비에는 아무도 찾아온 흔적이 없었다. “더는 전쟁하지 않는다는 게 좋기도 했지만, 고향으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이 전사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는데 너무 슬펐습니다.”
임옹은 1957년 육군수도방위사령부 기갑연대에서 이등상사(현재 중사)로 전역했다. 가족과의 재회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북에 남았고, 아버지는 피란 중 사망했다. 동생들 생사도 알 길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산가족찾기에도 여러 차례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탓인지 한 번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청년세대가 그려나갈 대한민국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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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옹은 2019년부터 6·25참전유공자회 포천시지회장을 맡아 지역 회원들을 위해 활발히 움직였다. 보훈 행사뿐만 아니라 군 행사에도 빠지지 않았다. 이 같은 활동으로 임옹은 재신임을 받아 지난 1월부터 4년의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인터뷰가 진행된 지난달 20일에도 임옹은 김성민(중장·진) 육군5군단장 취임식 참석을 위해 채비를 갖추느라 분주했다.
“그저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참전용사를 기억하도록 제 자리에서 애써보겠습니다.”
그에게 참전용사로서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늘 고맙다’는 답이 돌아왔다. 앞에 놓인 차 한 잔을 들이킨 그는 “후세가 강대국을 만든 덕분에 지금 이렇게 차도 마실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전장에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불편함을 겪으며 지켜낸 조국입니다. 지금의 성과는 거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여러분이 함께 만든 것입니다. 이제 6·25전쟁 참전용사는 대부분 90대가 됐습니다. 앞으로 당신들이 그려나갈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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