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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지문’같이 뚜렷한 동시에 씁쓸한 기억 하나가 있다. 지금보다 젊은 날의 어설픈 사랑에 관한 것이며,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생채기로 남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사랑과 상대가 받기를 원하는 사랑의 차이를 알려 하지 않고, 애써 노력하지 못한 결과로 인함이다.
“왜 당신은 당신 방법으로 날 사랑하려고 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지, 지금처럼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잖아!”
오랜 시간을 거슬러 ‘삶의 언저리에 봉인된 기억’은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 맺음’에 나를 주저앉히는 파편이 돼 그때의 생채기를 건드리며, 곧잘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그러나 주변의 많은 이가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노력하는지를 잘 모르는 듯하다. 늘 씩씩한 모습의 나(?)만 봐 온 까닭이다. 어쩌면 나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에 안도하고, 또 한편으론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소통과 공감은 서로 이웃하며, 가깝고 긴밀한 관계로 여긴다. 그러나 착각은 자유지만 ‘자의식의 함정’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소통은 내가 ‘타자를 만나는 문(門)’이고, 공감은 ‘타자와 그 문 안에서 만나는 방식’이다. ‘타자의 문’을 통과할 때는 존중, 배려, 경청 등의 심리적 절차와 비용이 필요하다. 이는 소통의 문을 통과할 때 드는 절댓값이고, 공감의 최댓값을 얻기 위한 절대비용이다.
자신의 현재와 미래 예측을 빗나가게 하는 것은 과거다. 과거로부터 배운 ‘자의식의 함정’은 오래된 자신의 습성에서 비롯된다. 생각과 행동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과 자부심은 종종 현실적인 상황과 다른 결과를 초래하며,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경험이나 지식 부족, 확증편향, 과도한 자신감 등이 주된 원인이다.
이러한 ‘자의식의 함정’은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국가 수준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조직 내에서 강력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면 조직은 분열되고, 역량은 저하된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생각과 감정을 조금 더 겸손하게 바라보고, 타인의 의견과 감정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람과의 관계 맺음에 나쁜 영향을 줄 가능성의 문 옆에는 ‘소통과 공감’을 다양한 레시피로 위장한 ‘불량식품 판매업주’가 ‘지하세계와 죽음을 관장하는 하데스(Hades)’처럼 지키고 있다. 그 문은 늘 입을 활짝 벌리고 누군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들 대부분은 힘 있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생각을 잘 안다고, 그리고 상대방의 감정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순간 제멋대로 누군가의 마음을 침범하거나 조종하는 ‘마인드 레이핑(Mind-raping)’ 유혹에 흔들릴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이 유혹은 마약과 같아서 한 번 시도하면 내성이 생기고 뿌리치기 어렵다. 그러나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소통과 공감은 ‘교착상태(Deadlock)’에 빠지고 만다. 이는 곧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깨진 ‘관계의 파탄’을 의미한다.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가 멀고, 서로의 불평등이 클수록 소통과 공감 노력은 부질없어 보인다.
시대가 변하면서 소통과 공감 방법도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능력인 ‘소통’과 ‘공감’은 때론 ‘삶의 엔트로피를 확장’시키기도 하지만, 서로의 ‘관계를 잇는 접착제’다. 그래서 진정한 소통과 공감은 훈습이 필요하다. 갈등과 불안이 팽배한 지금이 서로를 배려하고 보듬는 최적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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