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길에 군 정보과 지원
부대 이름도 군번도 없이 북한군 전투복 입고 첩보 활동
후배 장병들 군인정신 잃어서는 안 돼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37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 이재국 부회장
북한군 대구까지 밀고 내려왔다는 소식에
부모님·두 동생과 함께 피란길
일본 유학 갈 수 있다며 군 정보과 홍보
16세에 입대하며 가족과 생이별
훈련 기간 적 전투복 입고 전투기술 습득
적 후방 교란 주요 임무
별동대처럼 움직이는 탓에 일주일씩 굶고
물도 귀해 행군 중 논에 댄 물 마시기도
6·25참전유공자회서 열심히 활동
봉사 활동 통해 지역사회 발전 기여
전쟁 일어나지 않으려면 강력한 힘 필요
국난 극복 앞장선 참전용사 기억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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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상대의 기동과 전략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승리’는 손에 잡힐듯 가까워진다. 선제 공격으로 적을 초토화하거나 적절한 방어로 적의 공격을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요 전쟁사에는 적의 정보를 빼내 공유하고, 혼란에 빠뜨리는 첩보 활동이 빠지지 않는다. 6·25전쟁에서도 적 동향을 파악해 국군과 유엔군에게 전달하는 첩보 임무를 맡은 참전용사들이 있었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서른일곱 번째 주인공인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 부회장 이재국(88) 옹도 첩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글=배지열/사진 한재호 기자
군번도, 이름도 없는 첩보 임무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서울복지타운에 있는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 사무실에 들어서자 곳곳에 참전용사들의 흔적이 가득했다. 과거 그들이 남긴 승전의 기록과 영광의 순간이 담긴 흑백사진부터 최근 진행된 행사에서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노병(老兵)들의 표정까지. 이재국 옹도 전쟁의 기억을 또렷히 간직한 채 70년의 세월을 오롯이 겪어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적이 물밀듯이 남하하자 이옹과 부모님, 두 명의 동생은 피란길에 올랐다. 북한군이 대구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리던 8월의 어느 날. 그들은 고향인 경북 문경시를 떠나 청도군(당시 청평)에서 대구로 향하고 있었다.
“팔공산을 넘어 경산시 하양읍에 있는 개울에 천막을 치고 쉬는 중이었습니다. 사복을 입고, 권총을 찬 사람들이 군 정보과에 지원하라며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거기에서는 일본에 가서 관련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해서 저를 포함해 48명이 지원했고, 군용차 두 대에 나눠 탔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가지 못했습니다.”
16살의 어린 이옹은 그렇게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이옹은 “아버지는 이왕 입대할 거면 일본 유학을 갈 수 있는 직별이 좋겠다며 권유하셨습니다. 그동안 전쟁이 막을 내리고 평화가 올 거라는 기대도 있었죠. 어머니는 어쨌든 어린 아들이 입대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드셨는지 통곡했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북한군 복장을 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내린 이옹과 전우들은 처음에는 겁을 먹었다. 그러나 이내 본격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군인으로 거듭났다. 이옹은 “부대 이름도, 군번도 없이 ‘대한유격’이라고 쓰인 신분증이 전부였다. 아군에게 잡히면 그걸 보여주면 된다고 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교육 기간 이옹과 전우들은 적 전투복을 입었고, 전장에서 필요한 전투기술을 익히는 데 초점을 맞춘 각종 훈련을 소화했다.
아군에게 붙잡혀 고초 겪기도
이옹과 전우들이 전장에서 수행해야 할 주요 임무는 적 후방 교란이었다. 적 후방 부대에 침투해 서로 다른 막사에서 공격을 주고받고, 무기의 탄약이나 부품을 빼놓아 곧바로 전투에 임할 수 없도록 하는 역할이었다. 그는 “북한군이 계속 후퇴하고, 산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배운 걸 실제로 수행할 기회는 별로 없어 아쉬웠다”고 회상했다.
오히려 이옹과 전우들의 위기는 국군·유엔군과 마주쳤을 때 발생했다. 정확히 두 차례 아군에 붙잡힌 이옹은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1951년 4월의 어느 날. 낙동강 전선을 돌파해 북진하다가 충북 충주 수안보 인근에서 국군 특수부대에 걸렸다. 북한군 복장이었기에 당연한 결과였지만, 신원조회를 하고 최종 확인을 받아 복귀하는 데만 20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해 9월에는 미군과 맞닥뜨리면서 곤란에 빠졌다. 통역을 담당하던 인원도 없어 언어가 통하지 않아 포로수용소까지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옹은 “강원도 춘천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우리를 심문·심사하던 담당관이 고향 선배님이라 나를 알아봤다”며 “덕분에 풀려났지만, 고향인 문경까지 걸어가다 지쳐서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한 부대로 다시 자원 입대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전을 맞았다”고 말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 특히 적진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에게 안정적인 군수지원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우리는 별동대처럼 움직여야 해서 보급을 못 받으면 일주일을 굶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특식으로 소고깃국이 나오면 국물만 있었습니다. 우리끼리 ‘소가 밟고 지나간 국’이라고 말하기도 했죠. 물도 귀해서 행군 중 벼를 키우기 위해 논에 댄 물을 마신 적도 있습니다.”
봉사 활동으로 지역사회 발전 공헌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터지는 전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이옹. 조금 전만 해도 옆에 있던 전우의 생사가 나도 모르게 바뀌는 순간을 맞기도 했다. “저보다 2살 많고, 고향에서 같이 온 강성태라는 전우가 있었습니다. 우리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졌고, 그 친구가 다리를 많이 다쳤습니다. 급박한 상황이라 그를 데리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생존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이옹은 그러한 마음을 담아 6·25참전유공자회에서 진심을 다해 활동하고 있다. 2012년부터 참전유공자회 강동구지회 부지회장을 맡은 그는 지역에 거주하는 회원들을 관리하고, 봉사 활동을 펼치며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강동구 상일동 어린이공원을 찾아 자발적으로 청소하고, 지난해 10월에는 사비를 들여 지역 참전용사와 어르신들에게 마스크 1만 장을 기부했다.
이옹이 “3년 전부터 서울시지부 부회장을 겸직하고 있는데, 지부장님이 많이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말하자 옆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류재식 지부장(본지 2022년 7월 19일 자 8~9면 보도)이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의 성과로 이옹은 2013년 국가보훈처 호국영웅기장, 2021년 (사)대한민국통일건국회 보은 메달, 2022년 서울지방보훈청 표창장 등을 받았다.
각종 행사를 통해 군과 인연을 이어가는 이옹에게 후배 장병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군인정신’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제가 복무하던 때는 굉장히 힘든 조건에서 목숨과 젊음을 바쳐 나라를 지켜야 했습니다. 오랜 기간 전쟁이 없었고, 군 생활 여건은 몰라보게 좋아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이해지면 안 됩니다. 끝까지 군인정신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전장의 참혹함을 겪은 이옹은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굳건한 대비태세 확립을 당부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만약 전쟁에서 패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눌 수 있었을까요? 전쟁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되고, 그러려면 강력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난 극복에 큰 역할을 한 참전용사들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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