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스리랑카 1
대항해시대 440여 년 식민통치 받아
1972년 영국연방서 완전독립 후 내전
사망자 10만·난민 100만 남기고 끝나
코로나로 수출 막히자 국가경제 파산
항만 도로서 독립기념 대규모 시가행진
일부 영토 중국에 넘겨 울분 토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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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Sri Lanka)는 인도 남동쪽에 있는 나라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1972년 국호를 ‘실론’에서 ‘스리랑카’로 바꿨다. 국토 생김새가 눈물처럼 생겨 ‘인도의 눈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행정수도는 콜롬보, 국토 면적은 6만5610㎢로 한국의 65% 정도 크기다. 국민의 70%가 불교 신자다. 인구는 2200만 명, 연 국민개인소득은 2346달러 수준이다. 1983년 7월부터 시작된 다수민족 신할리즈(Sinhalese)족과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타밀(Tamils)족 간의 26년에 걸친 내전은 2009년 종식됐다. 아시아에서 가장 긴 민족 분쟁이었다. 현재 스리랑카군은 총병력 25만5000명(육군 17만7000·해군 5만·공군 2만8000)과 준군사부대 6만2000명, 예비군 5500명을 보유하고 있다.
스리랑카 관문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
내전, 테러, 경제적 파탄, 대통령궁 습격 등 스리랑카의 부정적 이미지는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사라졌다. 항공기 승무원도 “스리랑카의 치안은 100%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한다.
후끈 달아오르는 열기는 네팔과는 확연하게 다른 날씨다. 터미널은 깔끔했고, 시내로 가는 택시가 줄지어 대기한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터무니없이 높은 요금을 요구한다. 협상을 통한 택시비라면 단호한 태도가 우선이다. 기사 또한 요지부동이다. 대화를 중단하고 슬쩍 버스정류소로 가는 척했다. 기사가 다시 요금 협상을 시도할 것을 기대하며…. ‘어럽쇼, 부르지를 않네?’ 스스로 발길을 돌리는 것도 우습다.
때마침 자가용 영업 운전사가 부른다. 스리랑카에서는 일반화된 개인 자가용 택시란다. 공항로는 시원하게 4차선으로 뚫렸다. 운전기사 비반(Bivan)은 공군준위 출신이다. 21년간 복무 후 보안업체에 취업했지만, 낮은 급여로 생활이 힘들어 자가용 영업을 시작했단다. 보급 업무를 담당했던 그는 군시절 사진까지 보여준다. 스리랑카 직업군인들은 대부분 40대 중반에 전역해야 한다고 했다. 한인 민박집으로 안내한 비반은 다음 날도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융통성 있는 답사를 위해 섣불리 약속할 수는 없었다.
26년 내전, 그리고 이어진 경제적 파탄
스리랑카는 1505년부터 1948년까지 440여 년의 식민통치를 받은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다. 15세기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네덜란드와 교역했지만, 그들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1796년부터는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가 1948년 2월 4일 실론(Ceylon)으로 영국 자치령 형태의 독립을 했다. 1972년 국명을 ‘스리랑카 민주사회공화국’으로 바꾸고, 영국연방에서 완전히 독립했다. 그러나 1983년 7월 시작된, 인구의 74%를 차지하는 신할리즈족과 17%의 소수 인종 타밀족 간의 내전은 스리랑카를 지옥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서양 열강과 주변국들도 두 민족의 갈등을 부추기고 이용했다. ‘타밀 엘람 해방호랑이(LTTE·The Liberation Tiger of Tamil Eelam)’라는 무장단체는 소련과 동유럽 공산국가에서 무기를 지원받았다.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인도군까지 개입했지만, 1990년 3월 그들은 상처만 입고 철수했다. 납치·자살폭탄·테러로 전국을 피로 물들인 후 2009년 5월에서야 비로소 분쟁은 끝났다. 10만 명의 사망자와 100만 명의 난민을 남긴 내전은 스리랑카 역사의 수레바퀴를 한참 뒤로 돌려놓았다.
뒤이어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관광객 급감과 농산물 수출 길이 막히자 국가 경제는 파산했다. 시민 폭동으로 대통령궁은 점령당했고, 국가지도부는 해외로 탈출했다. 스리랑카는 국가 부채를 갚지 못해 콜롬보항만의 일정 구역까지 중국에 99년 동안 운영권을 넘겨줬다.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와 중국 소유 항만
콜롬보는 불과 수개월 전만 해도 무법천지였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질서는 회복됐고, 시민들의 발걸음도 활기찼다. 무장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가운데 시내 중앙광장에서 제75주년 독립기념 공연 준비가 한창이다. 지난 2월 4일 오전 항만 도로에서는 스리랑카군의 대규모 시가행진이 열렸다. 수십 개의 부대기를 들고 행진하는 기수단이 최선두다. 전통 복장을 갖춘 맨발의 군인들이다. 이어서 지휘부, 군악대, 육·해·공군의장대, 육군부대 등이 참여한 1시간에 걸친 퍼레이드는 전군이 동원된 느낌이다. 치마에 기관단총을 비껴 맨 여군부대가 지나가자 도로변과 옥상의 시민들이 열광한다.
행사장 바로 옆이 치외법권이 주어진 중국 항만이다. 비록 일부 영토를 중국에 넘겼지만, 군사력 과시로 그 울분을 토하는 듯한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전차·장갑차 기동, 공수부대 낙하, 공군 편대비행으로 기념행사는 끝났다. 아이들과 함께 시가행진을 지켜봤던 카를로스 씨는 “무능한 권력층이 나라를 망쳤지만, 국민이 반드시 스리랑카를 한국처럼 잘사는 국가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항공기로 뒤섞인 공군박물관
‘툭툭이’가 콜롬보 시내를 1시간 가로질러 공군박물관에 도착했다. 공군기지 속의 박물관 입장료는 현지인과 예비역은 200루피(한화 약 50원), 외국인은 15달러(한화 약 2만 원)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전역증을 내밀자 관리 병사가 부사관에게 보고한다. 잠시 고민하던 상급자는 필자에게도 현지인 요금을 적용했다.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횡재한 기분이다. 공군부대 속의 박물관이기 때문에 융통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전시장에는 생산 국가가 다양한 항공기들이 혼재돼 있다. 영국·소련·중국·이탈리아·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군사 장비들이다. 특히 헬기 주력은 대부분 소련제 MI 계열이다. 인접 활주로에서는 훈련기들이 수시로 이·착륙 훈련을 하고 있다. 스리랑카 공군은 경제력의 한계로 대부분 한 세대 전의 항공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인 교민이 말하는 스리랑카인의 삶
콜롬보에는 약 100여 명의 한인 교민이 살고 있다. 스리랑카는 한국과는 너무나 먼 국가이고, 최근 코로나19 팬데믹과 경제위기로 많은 한인이 귀국했다. 대신 한국 거주 경험의 스리랑카인들은 콜롬보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유학생 혹은 노동자로 체류한 현지인들이 많았다. 민박집 주인 J씨는 자녀 교육을 위해 오랜 기간 이 도시에서 거주했다. 저렴한 학비로 국제학교에 다닌 아이는 영어권 해외 대학에 곧 진학할 예정이란다. 대부분 현지인은 선량하지만, 합작사업을 추진하다가 어려움에 부닥친 한인들도 일부 있단다. 특히 한국과 스리랑카의 법규 차이를 몰라 한인이 사업투자금까지 날리는 경우가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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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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