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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의 붓끝으로 되살아난 6.25 캐나다와 중공군의 혈전

신인호

입력 2023. 04. 17   08:56
업데이트 2023. 04. 20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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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 저격수로 참전했던 캐나다 에드워드 주버(Edward Fenwick Zuber)의 ‘Holding at Kapyong.’ 캐나다전쟁박물관.
6·25전쟁에 저격수로 참전했던 캐나다 에드워드 주버(Edward Fenwick Zuber)의 ‘Holding at Kapyong.’ 캐나다전쟁박물관.

 

1951년 4월, 중공군의 제5차 공세 당시 영연방 제27여단은 화천군 사창리 방어선을 넘어 계속 남하해오는 중공군을 맞아 가평 북면 일대에 방어라인을 구축했다.

 

사창리에서 가평을 잇는 75번 도로 서쪽의 677고지에 캐나다부대를, 가평천과 화악천이 합류하는 도로 북동쪽 504고지에 호주 대대를, 그리고 여단에 배속된 미 제72 전차대대 1개 소대를 죽둔리에 배치하고 영국군 1개 대대를 예비부대로 편성했다.

 

중공군의 공격을 맡은 제20군은 예하 118사단으로 하여금 4월 23일 야간에 공격을 개시시켰다. 6·25전쟁 중 영연방의 대표적인 전투로 평가되는 ‘가평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은 당시 영연방의 배치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가평을 빨리 점령하고자 호주대대가 방어진을 펼친 지역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호주대대는 이에 대대의 화력과 지원된 전차 및 포병화력을 기습적으로 집중시켜 적을 격퇴했다.

 

하지만 4월 24일 오전 1시께 전방에 배치되었던 전차소대가 재보급을 위해 철수하자 중공군은 즉시 2개 대대로 포위공격을 해왔고, 호주대대는 새벽까지 혈전을 치르며 방어진지를 고수했다. 영연방 여단장은 호주대대를 약간 후방으로 철수토록 하고 미 전차 소대와 제16포병연대의 화력으로 대대의 철수를 지원했다.

 

캐나다 대대가 중공군과 전투를 벌인 것은 그 다음이었다.

 

캐나다 대대는 호주대대와는 달리 75번 도로 서쪽 677고지에 배치되어 13배가 넘는 중공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야 했다. 캐나다대대는 ‘패트리샤 공주 경보병연대(PPCLI·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예하의 2대대로서 병력은 450명에 불과했다.

 

677고지는 산세가 험한 고지로 방어에 유리했지만 6,000여 명의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펴며 이내 참호 턱밑까지 밀고 들어오자 2대대는 뉴질랜드군 포병대대에게 ‘진내사격’까지 요청할 만큼 악전고투해야 했다.

 

이때 미군은 이 전투에서 캐나다 2대대가 패배했을 것으로 믿었을 정도였으나 대대는 10명 전사에 23명 부상이라는 희생으로 1000~4000명의 중공군을 사상시키는 전승을 거뒀다. 영연방 27여단은 이같은 승리를 바탕으로 중공군 제 20군 예하 118사단의 가평 진출을 차단시키고 유엔군이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캐나다는 6·25전쟁 때 육·해·공군 총 2만 6791명의 장병을 파병했다. 미국, 영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규모이며,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한 4개 나라 중 하나다. 캐나다는 자국이 치른 전쟁 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적 업적으로 가평전투를 손꼽는다.

 

이 전투를 저격수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에드워드 주버(Edward Fenwick Zuber)가 ‘Holding at Kapyong’이라는 제목으로 그려냈다. 밤새 목숨을 무릅쓰고 고지를 지킨 장병들의 전투 상황, 그 상공으로 미군 항공기가 낙하산으로 보급 물품을 투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참전용사 윌리엄 크라이슬러(William Chrysler)는 “항공기에서 낙하산으로 탄약과 식량을 보급해 주었고, 용기를 얻은 우리는 시체를 밟으면서 물밀 듯이 올라오는 중국군의 공격을 격퇴하며 고지를 지킬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작품은 가로 101.7cm, 높이 76.4 cm의 크기로 캐나다전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신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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