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36) 마산서부지역전투 참전 류승석 옹

입력 2023. 04. 10   16:14
업데이트 2023. 08. 07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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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병처럼 꾸미고 점령지 침투
그 모습 기억하려 당시 복장 직접 제작

싸우겠다는 일념… 학도병 잊지 않았으면

36 마산서부지역전투 참전 류승석 옹

중학교 재학 중 학도병 지원
무기·군복도 지급받지 못하고
박격포탄 3개 들고 전쟁터로

마산서 진주 거쳐 남원으로…
지리산 자락서 북한군에 포위
후퇴 명령에 며칠 굶으며 귀향
중간에 붙잡혀 섬진강 다리 복구 노역
미군 F-80 전투기 폭격 틈타 탈출

마산서 부산 가는 관문 사수 위해
1950년 8월 미 25사단 배치
전투 경험 이유로 특수요원 차출
5일 만에 교육 마친 뒤
진동·함안 침투 군사정보 수집

지뢰 밟아 9개월간 입원한 친구
현역 아니라는 이유로 민간인 신분 퇴원
우리 활동 인정 못 받아 아쉬워

정찰활동 특수요원 중 유일한 생존자
마산서부지역전투 알리는 활동 심혈

73년 전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적진에 투입됐을 당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제작한 북한군 의용병 복장을 입은 류승석 옹. 오른쪽 사진은 자택에서 국방일보와 인터뷰하는 류옹.
73년 전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적진에 투입됐을 당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제작한 북한군 의용병 복장을 입은 류승석 옹. 오른쪽 사진은 자택에서 국방일보와 인터뷰하는 류옹.


마산서부지역전투는 1950년 8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북한군 2개 사단에 맞서 국군과 미군이 치열하게 벌인 공방전이다. 마산에서 ‘최후 보루’인 부산까지 거리는 불과 50㎞ 남짓. 마산을 넘어 단숨에 부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군을 저지해야 하는, 그야말로 국운이 걸린 절체절명의 전투였다. 당시 국군과 미군 장병들은 용전분투하며 낙동강 방어선 서남쪽 끄트머리를 지켜 냈다.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류승석(92) 옹은 마산서부지역전투에서 미 25사단 특수요원으로 활약했다. 북한군 점령지에 침투해 군사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마산 토박이로 지금도 고향에 거주하는 류옹이 6·25전쟁 한가운데 휩쓸린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 같다. 국방일보 연중기획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서른여섯 번째 주인공으로 그를 만났다.

글=이원준/사진=양동욱 기자


전쟁터로 향한 학도병…노역하다 탈출도

지난해 11월 창원시립마산박물관에서 열린 ‘대혈전의 마산방어전투’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는 류승석 옹. 본인 제공
지난해 11월 창원시립마산박물관에서 열린 ‘대혈전의 마산방어전투’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는 류승석 옹. 본인 제공



“미 25사단 정찰활동을 위해 적진에 들어간 30명 가운데 현재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해요. 첩자인 게 발각돼서, 지뢰를 밟아서 죽기도 했죠. 오죽했으면 닷새간 특수임무 교육을 받을 때 교관이 ‘너희는 죽은 목숨이니 살려고 하지 마라’는 말까지 했어요. 그래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적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지난달 30일 마산에서 만난 류옹은 73년 전 그날을 회고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고향 땅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사지(死地)로 뛰어든 19세 청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 듯 보였다.

마산 합포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류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학도병을 지원했다. 7월 10일 마산·진주·부산지역 학도병들과 경남도청 앞에서 신고식을 한 뒤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다 일주일이 안 돼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북한군이 코앞까지 당도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출동을 앞두고 무기와 군복을 받았지만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다. M1 소총은 10정에 불과했고, 군복은 미군이 버린 폐품을 재활용한 것이었다. 이마저도 숫자가 모자라 소총 한 자루 없이 전투에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동작이 느렸던 류옹은 무기와 군복을 지급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상관이 시키는 대로 박격포탄 3개를 들고 전쟁터로 향했다. 마산에서 출발해 진주를 거쳐 남원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학생복 차림으로 남원까지 걸었어요. 진주에서 남원까지 200리가 넘을 겁니다. 지리산 자락 야산에서 대기하는데, 빨치산이 접근해 ‘따발총’을 쏘더군요. 우왕좌왕하는 사이 북한군이 우리를 포위했어요. 상대가 안 됐죠. 무조건 후퇴하라는 명령에 며칠을 굶으며 되돌아왔어요. 후퇴하면서도 박격포탄을 날랐는데, 나중에 어느 군인이 ‘그건 이제 버리라’고 했죠.”

순천까지 후퇴했지만 북한군의 공격은 거듭됐다. 류옹은 민가에 몸을 숨겨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일단 고향으로 되돌아가자는 생각에 학도병 신분을 숨긴 채 순천시내로 향했다. 순천은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귀향 도중 북한군에 붙잡혀 섬진강 다리를 복구하는 노역도 했다. ‘쌕쌕이’로 불리는 미군 F-80 전투기가 폭격하는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고,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도착했다.


미 25사단 특수요원 차출 첩보·정찰활동

1950년 8월 마산에는 부산으로 가는 관문을 사수하기 위해 미 25사단이 배치돼 있었다. 마산 서부까지 진출한 북한군 6사단은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 등으로 구성된 부대로,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갖춘 최정예였다. 북한군 6사단장인 방호산은 마산을 가리키며 “우리가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북한군 정보가 필요했던 미군은 적 점령지에 첩보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마산에서 다시 학도의용대에 들어간 류옹은 전투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여기에 선발됐다. 30명이 차출된 부대는 번듯한 이름 하나 없었다. 특수임무를 한다는 지시만 있을 뿐이었다. 일본 헌병대가 주둔했던 시설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곧바로 실전에 배치됐다.

“마산에 돌아가니 전국에서 모인 학도의용대가 집결해 있었어요. 특수임무 수행을 위해 전투 경험이 있는 30명을 차출했는데, 거기에 나도 포함됐죠. 5일 만에 교육을 마친 뒤 미 25사단에 배속돼 15명은 진동으로, 15명은 함안으로 향했습니다. 적 후방 상황을 파악해 일주일 내에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죠.”

류옹은 이야기 도중 준비해 온 게 있다며 갑자기 짐보따리를 꺼냈다. 보자기에 고이 싸인 것은 허름한 옷가지였다. 빨간색 별을 단 모자는 북한군 복장과 비슷했다. 류옹은 73년 전 적진에 들어갔을 당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나중에 특별히 제작한 옷이라고 설명했다.

“북한군 점령지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당연히 공산주의자처럼 입어야 했어요. 당시 북한군 점령지에서는 빨간 별이 달린 모자를 쓴 의용병들이 죽창을 들고 다녔어요. 그래서 그들처럼 복장을 꾸몄죠. 절에서 옷가지를 구했고, 보따리에 미숫가루를 하나 넣고 향했어요. 진동에 가면 해병대진동리지구전첩비가 있는데, 당시 그곳까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류옹을 비롯한 특수요원들이 북한군 점령지에서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불과 5일간 훈련으로 적지에서 핵심 정보를 빼 오기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북한군 의용병들은 서울 출신이 많아 대화하다 발각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류옹은 기억했다.

“진동에 투입된 15명 중 돌아온 사람은 7명뿐이었어요. 친구 한 명은 지뢰를 밟아 9개월간 입원했어요. 그런데 현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민간인 신분으로 퇴원했어요. 가장 아쉽고 억울한 게 우리의 활동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나라 구한 마산서부지역전투 널리 알려지길”

지난해 6월 마산 진전초등학교를 방문한 류승석 옹이 학생들에게 6·25 참전 일화를 설명하고 있다. 본인 제공
지난해 6월 마산 진전초등학교를 방문한 류승석 옹이 학생들에게 6·25 참전 일화를 설명하고 있다. 본인 제공

 
류옹은 마산서부지역전투가 끝난 후 북진하는 미군을 따라다녔다. 노무병으로 전쟁터를 오가며 폭탄과 부상자를 나르기도 했다. 그러다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생활을 더는 견딜 수 없어 1952년 8월 미군 부대를 나왔다. 그해 10월 시험을 쳐서 공군 부사관으로 임관해 12년간 복무했다. 

최근 류옹은 마산서부지역전투를 대중에게 알리는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미 25사단 특수요원 중 유일한 생존자로서다. 지난해 6월엔 마산 진전초등학교를 방문해 전쟁의 참상을 학생들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6·25전쟁 때 북한군이 마산까지 진군했다는 사실을 들은 아이들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류옹은 말했다.

“나는 항상 어디를 가도 ‘국가! 안보!’를 외치며 경례해요. 초등학교를 찾았을 때도 아이들 앞에서 경례했죠. 강연 종료 후 한 아이가 다가와 ‘안보!’라고 외치더군요.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났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 안보를 걱정하는 노병의 마지막 바람은 마산서부지역전투를 알리는 기념관과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낙동강방어선전투 중 유명한 다부동·왜관전투와는 달리 마산서부지역전투는 미군이 주도한 까닭에 국내에서 관심을 덜 받아 왔다.

“마산서부지역전투는 마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입니다. 우리 학도병들은 적을 물리치겠다는 일념으로 전쟁터로 향했고, 그러한 힘이 모여 대한민국을 지켜 냈다고 자부합니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세대도, 국군장병도 국가 안보 수호에 최선을 다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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