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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승패 가르고 닥쳐올 현대전 참혹함 보여주다

입력 2023. 04. 05   17:09
업데이트 2023. 04. 0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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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화 - 게티즈버그(Gettysburg·1993)
감독: 론 맥스웰
출연진: 마틴 쉰, 톰 베린저,제프 다니엘스, 스티븐 랭

다양한 전투·행진 등 실감 재현 
3일간 5만1000여 명 죽거나 다쳐
철도 병력 이동…기동력 등 넓어져
제1차 세계대전 모습 미리 보여줘

게티즈버그전투는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남북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영화 ‘게티즈버그’ 스틸컷. 필자 제공
게티즈버그전투는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남북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영화 ‘게티즈버그’ 스틸컷. 필자 제공

 


“19세기 중엽 미국은 산업화 혜택의 분배 문제를 놓고 갈등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1860년 남부의 흑인 노예 수는 390만 명에 이르렀지만, 산업 기반 시설은 북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1861년 당시 북부에 깔린 철도 길이는 남부의 2.4배였다. 철 생산량은 20배, 총생산량도 32배나 북부가 남부보다 많았다. 이러한 격차는 지리적 조건과 인구, 천연자원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지만, ‘좋은 사회’에 대한 개념이 달랐던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북부와 남부의 견해 차이는 1860년 대통령 선거로 폭발했다.” 

『말랑하고 쫀득한 세계사 이야기』 중, W. 버나드 칼슨 외 지음, 푸른숲주니어 펴냄


남북 군, 게티즈버그에서의 조우

1860년 남부 11개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자, 링컨 대통령은 멕시코 전쟁의 영웅인 로버트 리 장군에게 북군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리 장군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고향 버지니아주에 대한 충성을 선택, 남군의 총사령관이 됐다.

남북전쟁(1861~1865) 전반기에 그는 불패의 장군이었다. 그런데도 리 장군은 늘 쫓기는 처지였다. 전세는 여전히 남군에게 유리했지만, 전쟁 자체는 북군이 공세였고 남군이 수세였다. 게다가 전쟁 발발 3년째였던 1863년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장기전으로 간다면 승산이 없다는 걸 인식한 리 장군은 대담한 작전을 구상했다. 남군의 정예병을 모아 북부의 수도 워싱턴을 바로 치자는 것이었다. 그는 2년간 계속되고 있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작정이었다. 승리하기 위해서 도박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이윽고 리 장군이 이끄는 7만6000명의 남군이 펜실베이니아에 나타나자 북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놀란 북군도 가용한 모든 병력을 차출했다. 북군이 동원한 병력은 9만 명이었다. 양군은 게티즈버그에서 마주쳤다.

전투는 3일간 벌어졌다. 전투 첫날은 남군에 우세하게 전개됐으나 북군의 수비를 결정적으로 깨지는 못했다. 둘째 날도 두 진영이 1.6㎞의 거리를 두고 평행으로 대치한 가운데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북군의 수비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마지막 날인 7월 3일 벌어진 남군 조지 피켓 소장의 공세는 남북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장중한 드라마였다. 이 공세는 참극으로 끝났다. 남군과 북군은 3일간의 공방전에서 5만1000여 명의 전사자와 실종자, 부상자를 냈다.


최후의 근대전, 최초의 현대전

영화 ‘게티즈버그(Gettysburg·1993)’는 남북전쟁의 승패를 가른 게티즈버그 전투를 다뤘다. 마이클 사라의 역사소설 『킬러 엔젤스』가 원작이다. 상영시간이 무려 261분으로 19세기에 벌어진 다양한 전투와 군대 행진, 장군들 간의 전투 회의 장면이 실감난다.

영화는 게티즈버그의 숲속에서 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한 남군 정찰자가 6월 30일에 제임스 롱스트리트(톰 베린저) 장군을 찾아오는 것에서 시작한다. 로버트 리(마틴 쉰) 장군은 뛰어난 전략으로 북군을 괴멸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전투에 임하고, 조슈아 챔벌레인(제프 다니엘스) 대령이 이끄는 북군 기병대는 취약점으로 여겨지는 곳에 매복해 싸움이 그곳으로 전개되기만을 기다린다. 곧 남북전쟁 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지독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남북전쟁은 최후의 근대 전쟁이자, 최초의 현대전쟁으로 불린다.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보병이 서서 일렬로 전진하는 나폴레옹식 전술은 종말을 맞았다. 반면 이 전쟁에서 최초로 전보와 사진, 관측용 풍선, 반자동 소총, 참호, 철조망이 이용됐다. 남군은 1864년 잠수함을 동원해 북군의 전함 찰스턴을 침몰시키기도 했다.

남북전쟁은 철도를 이용해 병력을 이동시킨 최초의 전쟁이기도 했다. 덕분에 전쟁 상황판이 갑자기 크고 복잡해졌다. 군의 기동력과 이동 범위가 크게 넓어져 전투의 가용 영역과 전술 영역도 넓어졌다. 따라서 남북전쟁의 전황은 한마디로 혼돈과 살육 그 자체였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남북전쟁은 현대적 전쟁의 참혹함을 최초로 경험하게 해줬다. 아울러 제1차 세계대전의 모습을 미리 보여줬다.

하지만 전쟁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산업혁명에 돌입했고, 20세기 세계 최강국으로 진입하는 경제적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최초의 대량살상무기인 기관총은 ‘제국주의’라는 야만의 시대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최초의 대량살상무기인 기관총은 ‘제국주의’라는 야만의 시대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최초 대량살상무기 ‘기관총’, 제국주의 완성 결정적 역할

맥심, 발사속도 대폭 높인 총 발명
가공할 성능…세계 전쟁 양상 바꿔

하이럼 맥심(1840~1916). 커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는 발명가다. 무려 ‘죽음의 발명가’로 불린다. 총기의 혁명이라는 ‘맥심 기관총’을 만든 까닭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41세 때 영국으로 귀화했다. 마침 영국에서 큰 시장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맥심조차 자신이 만든 기관총이 향후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꿀 줄은 몰랐을 것이다.

맥심이 개발되기 전 발사속도를 높이는 총기 개발자들의 오랜 꿈을 이룬 사람이 있었다. 1861년, 최초의 기관총인 개틀링을 개발한 리처드 J. 개틀링(1818~1903)이다. 이 기관총은 남북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의사였다.

맥심이 악명을 떨치게 된 계기는 1898년 9월 수단에서 벌어진 옴두르만전투. 2만5000명의 영국군과 이집트 혼성군, 그리고 수단의 이슬람 전사 5만2000명이 격돌했다. 사실 전투라기보다는 잔혹한 학살극에 가까웠다. 영국군은 연습 사격하듯 ‘킬링 존’에 들어온 적군에게 기관총을 난사했다. 당시 수단군 1만여 명이 몰살됐다. 이중 약 75%가 맥심 기관총에 희생됐다. 영국군 사망자는 48명에 불과했다.

마침 초급장교로 전투에 참전했던 청년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기관총이 불을 뿜자 총알이 적군의 살을 뚫고 들어갔고 그들의 뼈를 부수고 갈가리 찢어놨다. 기관총의 탄창이 비어서 땅에 떨어질 때마다 적군의 시체가 수북이 쌓였다. 포탄과 총탄의 굉음과 먼지 속에서 그들은 고통받고 탄식했으며 죽어갔다. 우리에게 달려들던 적들은 엉켜서 산 무더기처럼 쌓였고 후방에 있던 적들은 공포에 질려 멈춰 선 뒤 산산이 흩어졌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수단을 집어삼켰고, 그 가치를 입증한 맥심 기관총은 유럽 열강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904년 러일전쟁 땐 맥심의 파생형 기관총인 ‘PM1910’이 대규모로 실전 투입됐다. 러시아군은 뤼순전투에서 맥심 기관총 2대로 돌격하는 일본군 1개 보병 대대를 쓸어버렸다. 기병대와 보병의 돌격을 바보짓으로 만든 것이다.

결국 최초의 대량살상무기인 기관총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제국주의’라는 야만의 시대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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